이곳은 신라 충신(忠臣)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이다.박제상은 신라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이다. 눌지왕(訥祗王 : 재위 417∼458)이 임금이 된 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 싶어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卜好)를 구출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일본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 도 소용이 없자 그를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述嶺)에 올라가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은을암(隱乙岩)에 숨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述神母)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 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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