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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및 시조소개

영해박씨(寧海朴氏)

시조는 신라 갈문왕(葛文王) 아도(阿道)의 손자이며 눌지왕(訥祗王) 때의 충신인 제상(堤上)이고, 중시조는 고려의 전법사판서(典法司判書)인 명천(命天)이다. 대표적 인물은 경(經)·원계(元桂)·자청(子靑)등이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가구수 7,985가구로, 박씨의 0.7%를 차지한다.

시조 : 박제상 (朴堤上)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영해(寧海)는 경북 동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을 통일신라때 유린군(有隣郡)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예주(禮州)로 하였다가 1310년에 영해부로 개칭하였으며 1913년 영덕군에 통합되어 일부지역은 영해면으로 남아 있다.
영해박씨(寧海朴氏)는 신라 제 5대 파사왕의 5세손인 물품(物品)의 아들 제상(堤上)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시조 충렬공(忠烈公)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은 362년 삽량주 수두리(현 경상남도 양산군 소토면 효충동)에서 탄생하시어, 치산하(현 경상북도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서 성장하셨다.

신라 눌지왕(訥祗王)때의 충신으로 유명하며 신라 파사왕(破娑王)의 6세손이다.
어사대부 간관(御使大夫 諫官)과 이찬을 지냈고, 417년(눌지왕) 삽량주간(삽良州干)으로 있던 공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볼모로 잡혀 있던 눌지왕의 첫째 동생 복호(卜好,)를 탈출시켜 귀국했으며, 집에도 들르지 않고 다시 일본에 망명으로 가장하여 볼모로 잡혀 있던 눌지왕의 둘째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켜 귀국하게 하였다.
자신은 체포되어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고,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우는 등의 고문을 당하며 일본 신하가 될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거절하고 박다진-목도(博多津-木島)에서 소살(燒殺)되었다.
지금도 갈대 위가 붉은 것은 공의 피 흔적이라고 한다.
박제상이 부인 김씨에게는 알리지 않고 일본으로 떠난 뒤 그 사실을 알고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 위에서 몸부림치며 통곡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모래를 장사(長沙)라 하였으며,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을 벌지지(伐知旨- 뻗치다의 고유음)라 하였다.
제상이 돌아오지 않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두 딸과 치술령(-수릿재. 울산, 경주 경계에 있음.)에 올라가 남편을 부르며 통곡을 하다가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 첫째 아기(阿奇), 셋째 아경(阿慶)또한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을 하다 죽으니, 세 모녀를 "호국삼신녀(護國三神女)"라 칭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눌지왕은 크게 슬퍼하며 제상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내리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封)하였으며, 치술령에 은을암(隱乙庵)을 세우고 치제(致祭)하였다.
또한 제상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맞게 하여 은혜를 갚도록 하였다.

사람들이 선생이 떠난 울포 앞바다에서 부인이 엎드려 울었던 하서리(下西里) 갯가를 장사(長沙)라 불렀고, 부인 김씨를 치술신모(수릿재 신모)라고 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고 관설당을 배향(配享)한 충렬묘(忠烈廟), 국대부인을 모신 신모사(神母祠), 선생의 자녀 아기, 아경을 모신 쌍정려(雙旌侶)로 구성되어 있다.
그 후 제상의 26세손 명천(命天)이 고려 때 전법판서를 지내고 예원군(禮原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영해를 본관으로 하여 관설당(觀雪堂)을 시조로 하고 명천(命天)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영해박씨 이야기

신라 자비왕때 명신인 박문량은 제상의 아들로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항상 가난 속에서 청빈하게 살았으며 거문고를 즐겼고, 의복이 남루하여 백군데나 기운 누더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478년 그가 65세때 이벌찬의 벼슬에 올라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음을 개탄하여 천재(天災), 치폐(治弊), 처경(處境), 흥인(興人), 지인(知人), 화인(化人)등 여섯장의 상소문을 올리니 이 상소문은 너무도 유명했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때 거문고로 회포를 푸니 이것을 낙천낙(樂天樂)이라 하였다.

어느해 섣달 그믐날 사방에서 떡방아 소리가 요란하자 그의부인이 "남들은 곡식이 풍부하여 떡방아를 찧는데 우리는 당장 먹을 양식조차 없으니 어찌할꼬"하며 탄식하자 그는 태연하게 "사람에게는 수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것이니 오게 되면 받는 것이요 가게 되면 막을수 없는 것인데, 부인은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오" 하며 거문고를 당겨 방아소리를 구성지게 내어 부인을 위로하였다.

이 방아타령은 우식곡(憂息曲)을 대신하여 서라벌에 온통 퍼져 즐겨 불렀다고 한다.

영해박씨는 특히 신라와 고려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기초를 다졌다.
고려때 인물로는 중시조 명천(命天)의 아들 윤(論)이 평장사를 지내고 판병부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손자 선(宣)이 문종때 태자태사를 지내고 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그후 경창공주와 혼인하여 영성군에 봉해진 태고(太古)의 아들 용재(用才)와 용량(用良)의 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지금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는데, 맏아들 용재는 예빈경에 증직되고 차남 용량은 상서좌복야를 지냈다.
한편 관(琯)의 아들 원계(元桂)는 충숙왕때 강릉도존무사와 전법판서를 지냈으며, 경(經)은 조선이 개국된 후 대사헌과 완산부윤을 역임하여 평양서윤 창령(昌齡)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밖에 인물로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개탄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했던 도(渡),제(濟)의 형제 제(濟)와 숙질 규손(奎孫),효손(孝孫),천손(千孫),인손(璘孫),계손(季孫)등 칠의사(七義士)가 유명했다.

* 영해박씨는 2000년 경제기획부 인구조사에서 7.985가구에 25.189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