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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를 간행하면서

인류를 나무에 비유하면 조상(祖上)이 뿌리이고 자손은 지엽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뿌리가 튼튼하면 지엽이 무성할 것이고 지엽이 마르면 뿌리도 썩을 것이니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지엽을 무성하게 하는 것이요, 지엽이 무성하려면 뿌리를 튼튼하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옛 기록에 “조상이 훌륭한 업적이 있는데도 자손이 알지 못하면 이것은 조상님께 불효하는 것이고 조상의 업적을 알기만 하고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또한 조상님께 불효하는 것이며 조상의 업적이 없는데도 거짓업적을 꾸며서 전한다면 이것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자손된자 마땅히 조상의 업적을 알아야 하고 알면 즉시 후세에 널리 전하는 것이 자손의 도리라고 생각되어 문장은 비록 미흡하오나 정성을 다하여 감히 이 책자를 펴내는바 부족한 점은 보완해 주시기 바라며 이를 토대로 해서 후손된자 많이 읽고 또 후세에 천양하면서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2007. 2
영 해 박 씨 대 종 회
회장 城 秀
고문 大 熙

忠烈公 觀雪堂 諱堤上 年譜
- 공(公)은 서기 362년 혁거세 왕의 9세 손으로 삽량주수두리에서 탄생하시다
- 수학(修學)하기 위하여 경주로 이거(移居)하였고 김각간(金角干)의 따님과 결혼하시다
- 서기 385년에 어사대부 간관(御史大夫 諫官)이 되시다
- 서기 388년 종은대부광정보문전이찬(宗殷大夫匡靖寶文殿伊湌)이 되시다
-서기 395년 고향인 삽량주의 간(干 = 지금의 읍장)이 되시다
- 서기 417년 고구려에 특사로 파견되어 볼모로 가 있는 눌지왕의 아우인 복호를 데려오시다
- 같은 해 7월에 다시 왜국에 들어가 망명인(亡命人)으로 가장하고 볼모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둘째 아우 미사흔에게 접근하여 같이 지내다가 다음 해 안개가 낀 틈을 타서 왜국에 가 있던 강구려를 시켜 미사흔을 귀국시키고 공은 박다진목도(博多津木島)에서 57세로 순절하시다
- 부사로 선생을 모시고 왜국에 동행했던 김철복 공은 선생의 의관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혈서를 써서 신라에 전달하고 자신은 칼을 물고 자결하다
- 공의 부인 김교 김씨는 남편이 고구려에서 귀환하여 곧바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울산 률포로 달려가 배에 올라 떠나는 남편과 손을 흔들며 작별하시다
- 다음해 왕의 아우 미사흔만 왜국에서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의 부인은 세 딸과 함께 치술령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단식자진(斷食自盡)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시다
- 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은 모친을 따라 순사하여 치술삼신녀(鵄述三神女)가 되시다
- 이녀 아영은 나마저 모친을 따라 순사한다면 어머니와 언니, 동생의 시신은 누가 거두며 어린 남동생인 문량(文良 = 백결선생)은 누가 기르랴 하면서 효녀로서의 역할을 하시다
- 신라 조정에서는 선생, 부인 및 두 따님을 위하여 치술령에 은을암(隱乙庵)을 세우고 치제(致祭)하다
- 눌지왕은 선생에게 대아찬(大阿湌)을 추증하고 단양군(丹陽君 = 지금의 영해)을 봉하시다
- 신라 조정에서는 볼모란 국치(國恥)가 파기된 것을 기뻐하면서 양산에 선생의 “만고 충신비”를 세우다
- 신라 조정에서는 선생, 부인, 및 두 따님을 위하여 치산서원을 세우다
- 고려 왕건 태조(王建 太祖)는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을 시켜 공주의 계룡산에 동계사를 세워 선생을 초혼(招魂)하고 치제하다
- 양산 군민들은 양산에 효충사를 세워 선생과 아드님 백결선생 부자분을 치제하고 또 춘추원(春秋園)을 세워 선생을 치제하다

忠烈公 觀雪堂 諱堤上 事跡
공의 휘(諱)는 제상이요 자(字)는 상보(常甫) 또는 중운(仲雲)이며 호는 도원(桃園) 또는 석당(石堂) 또는 관설당(觀雪堂)이요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시니 혁거세 시조왕(赫居世 始祖王)의 9세손이요 五대 왕인 파사왕(婆娑王)의 5세손이시다. 부군(父君) 물품공(勿品公)께서는 제상과 지상(池上) 두 분을 낳으시니 장남 제상은 영해박씨의 시종조(始宗祖)가 되셨고, 차남 지상은 비안(比安) 박씨의 시종조가 되셨다. 공은 내물왕(奈勿王) 7년 임술(서기 362년) 9월에 삽량주(揷良州) 효충동(孝忠洞), 지금의 경남 양산군 소토면 효충곡(孝忠谷)에서 태어나 치산하(鵄山下 = 경북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서 성장하셨다.
신라 눌지왕은 훗날 공에게 대아찬(大阿湌)을 증(贈)하고 단양군(단양군 = 지금의 영해)을 봉(封) 하였다.
경주 치산서원(鵄山書院), 영해 운계서원(雲溪書院), 공주 동계사(東鷄祠), 양산 춘추원(春秋圓) 및 효충사(孝忠祠)에서는 공에 대하여 향사를 받들고 있으니 선생의 사적이 동사(東史) 및 삼강 오륜록(三綱 五倫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공은 신라(新羅)의 충신열사이시다.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엄한 교훈아래 문무양면(文武兩面)의 수련(修練)에 힘써 말 타기, 활쏘기, 달리기 등에 능하여 20여세의 젊은 나이로 고을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셨다.
박제상 선생이 활동했던 시대상황과 선생의 업적에 대하여 먼저 대략을 소개한다. 당시 신라의 주변 상황을 살펴보면 북쪽에서는 광막한 만주(滿洲) 벌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는 고구려(高句麗)가 국경(國境)을 자주 침입하여 신라를 괴롭혔고, 서쪽에서는 왜국(倭國)과 친한 백제(百濟)가 가끔 집적거리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왜국이 신라의 해안(海岸)을 자주 침범하여 신라는 매우 어려운 주변상황에 놓여 있었다. 내물왕 37년(서기 392년)에는 실성(실성 = 훗날에 실성왕이 됨)이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으며 10년 후인 실성왕 1년(서기 402년)에는 내물왕의 막내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이 왜국에 볼모로 갔고, 또 다시 실성왕 11년(서기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卜好)가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 신라에 일어났다.
이러할 무렵에 아직까지 세상에 이름은 물론 용맹과 지혜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공이 나타나 뛰어난 지략과 용기를 발휘하여 홀로 고구려에 들어가 볼모로 잡혀있던 복호왕자를 구출해 왔고, 이어서 왜국에 입국하여 볼모로 잡혀있던 미사흔 왕자를 무사히 귀국시키고 선생 자신은 악독한 왜놈에게 붙잡혀 처참히 왜국에서 순절(殉節)하셨다. 대한해협(大韓海峽) 목도(木島)에 뿌린 충렬공 박제상 선생의 충절의 피, 서라벌 땅 수리재에 얽힌 슬픈 이야기는 긴 세월을 두고 우리들의 가슴을 포근히 적셔 줄 것이고, 공이 보여준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날카로운 단충(丹忠)의 여열(餘烈)은 우리 후손들의 폐부(肺腑)를 찌르게 한다.

대략 초(抄)하여 보건데, 서기 392년 정월 대보름날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 벌판에는 수백명의 호위병을 거느린 고구려 사신(使臣) 일행이 도착하였다. 호기심에 가득찬 서라벌 백성들은 길가로 몰려나와 고구려 사신들을 구경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저 사람들이 왜 왔을까? 전쟁이라도 일어날 모양인가? 글쎄 해마다 왜병이 쳐들어오고 백제 녀석들도 자꾸만 기웃거리는 판에...큰일이야.” “고구려에는 지금 새로 앉은 임금이 북쪽의 거란을 물리치고 백제를 쳐부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데, 아마도 우리가 백제를 도울 까봐 미리 겁을 주는 것이 아닐까? 그럴 거야.” “고구려의 새 임금은 태자(太子)로 있을 때부터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진 무서운 사람이래.” “그는 동방(東邦)을 통합시킬 큰 뜻을 품고 있다 하더군.” 사람들은 지나가는 고구려 사신들의 행렬(行列)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별의별 추측을 다 해보는 것이었다. 고구려 사신들은 머리 위에 긴 새깃이 꽂힌 모자를 쓰고 당당하게 지나갔다. “저 건방진 꼬락서니를 좀 보게나.” “아무렴... 그러니 우리들도 하루빨리 힘을 길러서 저 건방진 놈들을 혼내줘야 하네.” 서라벌 백성들은 누구나 눈꼴사나운 고구려 사신들을 미워하였다. 거리를 누비고 거드름을 피우며 지나간 고구려 사신들은 곧장 대궐문 앞에 이르렀다. 신라 대궐의 호위 군사들이 나와서 “군사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사신들만 들어오라는 분부 이십니다”라고 말하고 고구려의 병정(兵丁)들이 대궐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고구려 사신들은 호위병들을 대궐문 밖에 남겨 둔 채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내물왕은 용상에서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앉아 있었고 양편에는 신라 조정의 대신들이 죽 늘어서 자리 잡고 있었다. 고구려 사신이 “우리 대왕께옵서는 신라 대왕님의 안녕을 빌고 계십니다. 라고 말하고 내물왕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엎드렸다. 내물왕이 내려다보시며 “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들이 많았겠소.” “듣건대 고구려의 새 임금께서는 대단히 영특하시고 인자하시다고 하던데”라고 말했다. “예! 우리 대왕께옵서는 지혜와 용기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품은 뜻이 매우 크십니다.” “허 그러하오? 그런데 무슨 일로 사신을 보내시었소.” “예! 여기 국서(國書)에 모든 내용이 적혀 있사옵니다.” 고구려 사신은 신라왕에게 가지고 온 국서를 올렸다. 내물왕은 국서를 천천히 받아 펼치고 한동안 읽어 보았다. “고구려왕은 신라왕에게 글을 보내어 두 나라의 두터운 화목과 영구한 평화를 위하여 요청하오니...” 고구려왕이 보낸 국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물왕은 계속 읽어 내려갔다. 모든 대신들이 숨을 죽이고 내물왕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내물왕은 고구려가 보낸 국서를 다 읽고 나서 고구려 사신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내물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잘 알았소.” “대신들과 더불어 상의하여 처리할 터이니 여러분들은 객관에 나가 여로(旅路)의 피로를 푹 풀도록 하시오.” 고구려 사신들은 객관으로 물러갔다.

내물왕은 내실로 들어가 모든 대신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고구려에서 신라의 왕족(王族) 한사람을 볼모로 보내달라고 요구해왔소.” “신라와 서로 친분을 맺자는 구실로 그럴듯한 이유를 붙였소만, 사실인즉 우리를 억압하기 위하여 이러한 만행을 자행(恣行)하는 것이오. 그러면 이 일을 도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대신들은 누구 하나 말문을 열지 못하고 모두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당시 신라는 아무리 해도 고구려에 대항할 만한 힘과 용기가 없는 형편이었다. 신라의 대신들은 결국 고구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족 중에서 가장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볼모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볼모가 되는 자는 외교술이 좋아 남의 나라에 가서 훌륭한 사람들과 사귀기도 잘 하여야 하고 또 자기 나라의 기밀(機密)을 지키며 나라의 체면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영특한 인물을 골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찬대지서(伊湌大知西)의 아들인 실성이 가장 적임자라고 결정되었다. 그는 언행이 신중하고 풍채도 늠름하였다. 마침내 서기 392년 정월 15일에 실성은 고구려 사신들을 따라 볼모로 고구려에 들어가게 되었다.
때는 실성이 볼모로 잡혀간 후 8년이 지난 서기 400년(내물왕 45년)이었다. 바로 그 해 왜병이 대대적으로 신라에 침범해왔다. 왜국은 백제(百濟)의 충동질을 받아 신라를 침범했던 것이다. 신라의 모든 백성들이 왜병의 분탕(焚蕩)질에 괴로움을 당하게 되자 내물왕은 하는 수 없이 황급히 고구려에 구원병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영수(領袖) 광개토왕(廣開土王)은 5만의 군사를 보내주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신라를 도와 왜병을 몰아내고 왜군과 가까이 지내는 가야(伽倻)까지 공격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고구려에서는 신라 영토에 군사를 주둔(駐屯)시키고 심지어는 신라의 내정(內政)까지 간섭하였다. 그 이듬해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실성은 8년간 볼모로 잡혀있는 동안 그리운 고향 생각과 함께 자기를 볼모로 보낸 내물왕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복수하고야 말겠다고 마음깊이 다짐하며 고구려의 대신들과 가까이 지냈다. 실성이 볼모에서 풀려 신라로 돌아온 이듬해 2월에 내물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내물왕의 아들은 아직 어렸었다. 장자 눌지(訥祗)가 15세, 이자 복호(卜好)가 13세, 삼자 미사흔(未斯欣)이 10세였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실성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가 은근히 압력을 넣어 실성을 왕위에 앉힌 것이었다. 고구려로서는 자기들과 가장 친한 실성을 왕위에 올려놓고 신라 땅덩어리를 손에 쥐고 마음대로 흔들 속셈이었던 것이다.

실성이 왕위에 오르자 신라의 조정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에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실성왕은 고구려의 조종(操縱)을 받을 수밖에 없는 반면, 신라 대신들로부터는 지지(支持)를 크게 받지 못했다. 신라 대신들은 대부분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의 편이었다. 이렇게 되자 실성왕은 자기를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조정에서 내쫓아 버리기도 하였다.
그 해 3월 어느 날 왜국에서 갑자기 사신이 도착하였다. 그 내맥(來脈) 인즉 새로 신라의 왕으로 즉위한 실성을 축하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신라의 사정(私情)을 염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왜국의 사신들은 뒤통수에 주먹 같은 상투를 틀어 붙이고 알록달록한 위 저고리에다 자줏빛 아래치마와 길고 짧은 두 자루의 칼을 찬 우스꽝스러운 몸차림이었다. 게다가 한결같이 모질고 독살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왜국 사신들은 대궐 안으로 들어가 실성왕 앞에 넙죽 엎드려 절하고 간사스런 어조(語調)로 아뢰었다. “대왕님 저희는 대왕님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소국(小國)의 왕명(王命)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여기 우리 왕의 친서가 있사옵니다.” 하고 왜국 사신들은 왜국 왕의 편지를 실성왕에게 올렸다. 편지의 내용인즉 “나는 대왕의 즉위를 축하하며 앞으로 양국간의 영원한 평화를 빕니다. 대왕의 그 큰 덕을 기리기 위하여 대왕의 왕자와 사귀고 싶사오니 왕자 한 분을 소국에 보내 주십시오. 그런데 백제가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어 우리(왜국)와 연합하여 신라와 고구려를 치자고 하오니 깊이 생각 하십시오.” 편지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즉 신라의 왕자를 볼모로 왜국에 보내지 않으면 백제와 합세하여 신라를 쳐들어오겠다는 일종의 음흉(陰凶)한 협박이었던 것이다.
실성왕은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왜놈들이 또 볼모를 요구하다니... 어쩌면 좋을꼬? 전왕(前王)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버릴까? 음, 그러면 나의 평소 원한을 풀 수 있고 또 화근(禍根)거리를 없애 버릴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실성왕은 내물왕의 막내 왕자인 미사흔을 볼모로 왜국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사실을 알자 곧 반대하였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왜놈들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다니 그것은 절대 안 될 일이옵니다.” “더구나 이제 겨우 열 살 밖에 안 된 미사흔 왕자를 어찌 적(敵)의 땅에 볼모로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성왕의 일편 비뚤어진 고집은 대신들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겨우 열 살 갓 넘은 어린왕자 미사흔은 왜선을 타고 머나먼 왜놈 나라로 볼모로 결국 떠나게 되었다.
떠나가는 해안(海岸)에는 눌지와 복호의 두형 그리고 궁중(宮中)의 늙은 신하 몇몇이 나와 어린 미사흔의 무르디 무른 두 손을 꼭 잡고 마냥 울었다. “왕자님! 부디 몸조심 하시와 잘 다녀오시오”하고 신하들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간장을 찢는 듯 하는 그들의 슬픔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고사리 손을 마냥 흔들며 울먹이는 미사흔, “큰형, 작은형, 잘 이어. 나... 금방... 다녀올게...” 그러나 배는 끝내 수평선 너머로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미사흔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두 형이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한시 바삐 돌아오기 만을 기다렸으나 미사흔은 안타깝게도 돌아와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큰형 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실성왕에게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고 가슴 깊이 벼르게 되었다. 한편 실성왕은 그러한 눌지를 달래기 위하여 자기의 딸 아로를 눌지에게 시집을 보냈다. 아로는 비록 눌지가 미워하는 실성왕의 딸이었으나 용모가 아름답고 마음씨가 고운 덕 있는 아가씨였다. 그러한 아로는 눌지를 몹시 존경하고 받들었다.

그 후 고구려의 세력은 하늘을 찌를 듯이 날로 세어져만 갔다. 그래서 광개토왕은 넓은 만주(滿洲) 평야와 기름진 한강유역(漢江流域), 광대한 서북(西北)지방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서기 412년 실성왕이 즉위 한지 12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광개토왕은 또 신라에 국서를 보내어 볼모를 요구해 왔다. “귀국 선왕(貴國 先王)의 둘째 아들인 복호가 뛰어난 지혜와 인품을 지녔다고 하니 그와 사귀어 보고 싶소. 그래서 특히 사신을 보내어 청하오니 양국의 친교를 위하여 꼭 복호 왕자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표면으로는 그럴듯하고 정중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속셈인 즉 뻔한 일이 아닌가? 실성왕은 고구려의 이러한 요구에 순순히 응하였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둘째 복호가 고구려 볼모로 가게 되었다.
복호가 떠날 때 실성왕은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복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나는 그대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하여 부득이 한 일이니 어찌하겠느냐.” 눌지는 둘째 동생이 또다시 적의 나라에 볼모로 가는 것을 보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날카로운 쇠붙이로 가슴을 후벼 파는 것과 같은 아픔이었다. 눌지는 울고 또 울었다.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아... 아우들아 이 원한을 어떻게 갚는단 말이냐!” 그러나 복호는 끝내 고구려로 떠나고야 말았다.

복호가 고구려로 떠나간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복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한 원한과 슬픔이 뒤섞인 채 무정한 세월은 흘렀다. 그 동안 눌지는 씩씩하게 자라서 어느덧 의젓한 덕망 높은 어른이 되었다. 이러한 눌지에 대하여 실성왕은 은근히 불안한 생각을 가져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처치해 버려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은밀히 고구려군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정작 고구려 조정에서 눌지에 대하여 보고는 그 늠름한 인품에 탄복하게 되어 고구려군의 대장은 도리어 실성왕을 없애버리고 눌지를 왕위에 앉히고야 말게 되었다.
원한과 슬픔으로 세월을 보내던 눌지는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용상(龍床)에 앉아서도 침상에 누워서도 언제나 창문을 통하여 먼 북쪽 고구려의 하늘과 바다건너 왜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로 세월을 보낼 뿐이었다.
눌지왕이 즉위한지 몇 달 뒤의 일이다. 그 해 9월에 대궐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눌지왕의 등극(登極)을 축하하는 잔치였다.
이윽고 술잔이 오가고 하면서 흥겨운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궁녀(宮女)들의 춤도 무르익고 술자리는 점점 흥겨워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눌지왕은 여전히 근심에 잠긴 채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모든 것이 흥겹기만 한 이 마당에 눌지왕은 너무나도 외롭고 슬픈 모습뿐이었다. 그래서 신하들도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러자 잠자코 앉아 있기만 하던 눌지왕이 천천히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눌지왕은 한참동안 신하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 충신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앉아 대왕(大王) 만세를 불러주니 과인(寡人)은 감사할 따름이오. 그러나 한편 나라 일을 생각하고 신변을 돌아보니 짐(朕)의 마음은 몹시 서글퍼지는 구료.” 신하들은 모두 다 고개를 숙이고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과인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웃 나라들의 군사가 틈틈이 우리 신라를 노려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겠소. 그러나 여러 충신들의 용기와 지혜로 이제 우리 신라는 그들을 능히 막아 낼 힘이 생겼고 나라도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소. 그러나 과인이 가장 사랑하는 두 아우들은 왜국과 고구려에 각각 볼모로 끌려간 채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 않소? 과인은 그들이 볼모로 보내진 후부터 울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소. 그러니 과인의 마음은.. 과인의 마음은...”
복바쳐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띄엄띄엄 말하던 눌지왕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하였다. 눌지왕의 얼굴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기만 하고 있었다. 잔치자리는 금방 숙연해지고 말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고개를 떨구고만 있을 뿐이었다. 눌지왕의 슬픔은 온 신라의 슬픔이었다. “나라가 약하기 때문에 왕자들을 적국(敵國)에 볼모로 보내야 하다니! 그리고 그 왕자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니...” 눌지왕은 잠시 말이 없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여러 신하들의 충성에 과인은 항상 고마워하고 있을 뿐이오. 그러나 과인이 두 아우들을 만나 조상님들의 사당에 절하고 함께 기뻐할 수만 있다면 과인은 그 공을 세운 사람을 평생토록 잊지 않으리다. 그 은혜는 꼭 갚으리다. 그러니 누군가 꾀를 써서 그 일을 능히 해 낼 사람은 없겠소?” 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말했다. 장내는 기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누구 하나도 선뜻 왕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왕은 신하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눈 여겨 보았으나 그 일을 해낼 만 한 사람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때 서발한(신라의 으뜸 벼슬로 “이벌찬” 이라고도 함)이 앞에 나서며 아뢰었다. “대왕께서 말씀하신 일은 매우 중대하고도 어려운 일이 옵니다. 성공한다면 천만다행 이지만 만약 실패하는 날엔 나라가 위험하게 될지도 모르옵니다. 그러하오니 반드시 뛰어난 지혜와 용기를 갖춘 사람 이야만 그 일을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런 인물이 과연 있겠소?” 눌지 왕은 초조하게 물었다. 서발한은 다시 엎드려 아뢰었다. “황송하오나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는 그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는 줄로 아옵니다. 소신의 생각으로서는 아무래도 초야(草野)에 묻혀있는 젊은이, 용기와 지혜가 뛰어난 젊은 사람을 찾아야 할 줄로 아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이요?” “그것은 조정의 대신들보다도 지방과 민간의 사정을 더 잘 아는 촌장(村長)들을 불러서 물어 보심이 좋을까 하옵니다.” “촌장이라면 누가 좋겠소.” “예, 수주(지금의 예천)의 촌장 벌보리와 일지(日知 = 지금의 선산)의 촌장 구리내와 이이 촌장 바로 이 세 사람이온데, 이들은 어진데다가 나이와 경력도 많아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사오니 이들을 불러 물어 보심이 좋을 줄 아옵니다.” 이 말에 눌지왕은 비로소 밝은 표정으로 변하였다. “알겠소. 그 세 사람을 곧 부르도록 하시오.”
다음 날 대궐로 불려온 세 촌장들이 왕 앞에 엎드렸다. “이렇게 오느라고 수고했소. 다름이 아니라 볼모로 잡혀있는 과인의 두 아우를 적국에 가서 데려올 수 있는 용기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지 물어보려고 그대들을 부른 것이오. 마땅한 적임자가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천거해주시기 바라오.” 눌지왕의 말에 세 촌장들은 함께 입을 모아 아뢰었다.
“소신들의 생각으로는 삽양(지금의 양산)의 주간(지금의 읍장)으로 있는 박제상이 용기와 지모(智謀)가 뛰어난 인물이온 즉 그 사람이면 능히 상감마마의 소원을 풀어드릴 수 있을 줄 아옵니다.” “박제상이라...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요?” “예 그는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세 사람은 박제상공에 대하여 자세히 아뢰기 시작하였다.

박제상 공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9세손으로 제5대 파사왕의 5세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사후(死後)에 왕으로 추봉된 갈문왕(葛文王) 아도(阿道)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파진찬(해군대령에 해당됨)의 벼슬을 지낸 물품공이었다. 물품공은 일찍이 왜적이 신라에 쳐들어 왔을 때 이것을 미리 알아채어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용장(용장)이었다. 이러한 집안에서 태어난 박제상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데가 많았다. 그는 부모의 엄격한 교훈 밑에서 글과 무술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천성이 영리한 그는 문일지십(聞一知十 = 한 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를 앎) 할 정도였다.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다. 후 일에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해낼 인물이 될 것이다.” 박제상 어린이에게 글과 무술을 가르치던 스승은 늘 이렇게 박제상을 칭찬하였다.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아도(阿道)는 여러 손자중에서 박제상 어린이를 가장 귀여워하였다.
이러한 박제상 공은 어린시절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나는 나의 모든 재주와 능력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바치리라.” 소년 박제상은 철이 들면서 마음속에 항상 이렇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일신의 출세나 이익 같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나라와 백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소년 박제상은 이미 전쟁에서도 여러 가지의 많은 공을 세웠다. 왜적이 쳐들어 왔을 때도 아버지를 도와 빛나는 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왜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 박제상은 조금도 자기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나는 나의 공을 내세우기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다. 다만 신라를 위하여 싸웠을 뿐이다.” 청년 박제상은 이렇게 생각하고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열(熱)을 기울였다.
그러한 그였기에 하찮은 주간의 벼슬에 만족하여 열심히 백성들을 보살폈던 것이다. 왜적의 침략이 있었을 때 다른 곳은 다 왜적들의 노략질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박제상 공이 주간으로 있던 삽량주 만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왜적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었다. 공은 이렇게 충실한 사람이면서도 그 지모와 말재주가 놀라왔다. 이러한 제상은 자연히 온 고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공의 나이는 30세 안팎이었다. 집에는 착한 아내와 귀여운 아들 백결(百結)선생과 세 딸이 있었다.

촌장들의 이야기를 들은 눌지왕은 급히 공을 궁궐로 불러오게 하였다. 이윽고 왕의 특명을 받은 특사(特使)가 말굽소리도 요란하게 급히 삽량주로 달려갔다. 눌지왕이 보낸 사신은 이튿날 삽량주 박제상 공의 집에 이르렀다. “임금님께서 부르십니다. 어서 서라벌로 가십시다.” 사신은 하루의 일을 끝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 공에게 왕의 명령을 전하였다. 공은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에서는 그의 부인이 궁금히 여기며 기다리고 있었다. 공의 부인은 정말 정숙하고 훌륭한 부인이었다. 공은 아내에게 왕이 자기를 부른다는 것을 알렸다. “갑자기 나 같은 하찮은 신하를 부르시니 분명히 나라에 중대한 일이 생긴 모양이오. 그러니 곧 서라벌로 떠나야겠소.” 아내는 남편의 말을 듣자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짐작이라도 가지 않으셔요? 어쨌든 임금님께서 급히 부르시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니 속히 가시어 잘 처리 하시고 돌아오셔요.” “그 동안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 그런건 염려 마셔요, 당신이나 몸조심 하셔요.” 박제상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서둘렀다. “아빠가 벼슬이 올라 서라벌로 가신대...” “아이 좋아라! 나도 서라벌에 가고 싶어.” “서라벌은 참 좋다지. 대궐도 아주 굉장하고 별의별 것이 다 있고...” “아빠 오실 때 좋은 선물 많이 사다 주셔요.” 귀여운 어린 세 딸은 영문도 모르고 좋아하였다.

가족들과 작별한 박제상 공은 사신들과 함께 급히 서라벌로 말을 달렸다. 그는 지체 없이 대궐로 들어가 눌지왕 앞에 엎드렸다. “급히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부디 과인을 위하여 힘을 써주오.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으리다.” 눌지왕은 박제상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소신이 알기로는 임금님의 근심은 온 백성의 근심인 줄 아옵니다. 지금 마마께서 이토록 상심하고 계시거늘 백성인 저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 어찌 일의 쉽고 어려움을 헤아린 다음에야 일을 행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신은 비록 미숙하오나 열과 성을 다하여 마마의 뜻을 받들겠사오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공의 얼굴에는 바위와 같이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러한 박제상을 대면하자 눌지왕은 매우 기뻐했다. 왕은 잔치를 베풀고 공에게 내말(신라 관등의 11째 계급)의 벼슬을 내렸다. 눌지왕은 공과 마주 앉아 친히 술 한 잔을 따라 절반을 공에게 권하고 남은 반 잔은 자기가 마셨다. “부디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오.” “소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기필코 마마의 뜻을 이루겠나이다.” 박제상은 다시 한번 굳게 맹세하였다.

이튿날 공은 홀로 북쪽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눌지왕이 친히 성 밖까지 나와 먼 길을 떠나는 공을 배웅하였다. 북으로, 북으로 말을 달리는 공은 며칠 후 고구려의 국경을 넘었다. 국경에 이르러서는 미리 준비해 온 고구려 옷으로 갈아 입고 행상처럼 변장했다. 이러한 공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루에 100여리 씩 걸어서 열흘(지금의 안변)을 지나고 대재(지금의 황초령)를 넘어 강계에 이른 것은 서라벌을 떠난 지 한달 반만의 일이었다. 그 동안 겪은 고생과 위험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은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 등을 자세히 알아 본 후에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지금의 만주 집안현)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하였다. 국내성에 들어간 공은 그날 밤으로 곧장 복호를 찾아갔다. 복호는 어느 조그만 골목 안에 있는 공관에 살고 있었다. 거의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은 공관을 지키는 수비병을 그럴듯한 말로 꾀어 복호를 무난히 만날 수 있었다. “전하! 저는 신라에서 임금님의 명을 받고 비밀리에 이 곳에 온 사람입니다.” “무엇이라고! 신라에서 왔다고! 신라에서...” 복호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렇습니다. 마마께서는 전하를 몹시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하여 저를 보내어 전하를 모셔 오도록 하셨습니다.” “아! 천지신명이 나를 살리셨구나!” 복호의 가슴은 감격과 흥분으로 터질 것 만 같았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그날 밤이 새도록 고구려를 탈출할 작전을 마련했다.
이튿날 박제상은 정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준비해온 눌지왕의 친서를 가지고 고구려의 대궐로 들어갔다. 그는 신라의 사신임을 전하고 고구려의 장수왕 앞에 나아갔다.
“신라 대왕의 명을 받자와 신라왕의 아우인 복호를 돌려보내 주시기를 대왕께 간청하러 왔나이다. 예로부터 이웃 나라끼리 사귀는 도리는 성심과 믿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나이다. 그러한 즉, 다만 볼모를 잡고 두 나라가 사귄다면 그것은 오패(五覇 = 중국 전국시대의 다섯 왕) 행위만도 못한 짓인 줄 아옵니다. 우리 임금님의 사랑하는 아우가 이 곳에 온지도 거의 10년이 지났고, 그 동안 우리 임금님께서는 자나 깨나 한숨과 눈물로 아우를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대왕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 임금님의 아우를 보내 주신다면 우리 임금님께서는 대왕의 은혜를 그지없이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대왕께옵서는 부디 깊이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박제상은 의젓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하였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과연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박제상의 당당한 기풍과 조리가 있는 말솜씨에 그만 탄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 대신들 중에서 끝내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서 복호의 정식 송환은 늦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박제상은 복호와 은밀히 약속을 하고 먼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을 떠났다. 그는 왔던 길을 통하여 5월 15일에 달골(지금의 강원도 고성) 포구에서 배를 준비하고 복호 왕자를 기다렸다. 국내성에 남은 복호는 며칠간 아프다는 핑계로 공관에 누워 있다가 변장을 하고 밤중에 살짝 공관을 빠져 나왔다. 두 사람은 달골 포구에서 만났다. “자! 어서 배에 올라 이 곳을 떠나십시다.” 두 사람은 급히 배에 올라 노를 저었다. 배가 막 포구를 떠나려 하자 고구려 병사 수십 명이 달려와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을 부르는 게 아닌가? “ 신라왕의 아우는 배를 멈추시오. 우리는 고구려 왕명을 받고 달려왔소. 우리말을 듣지 않으면 활을 쏘겠소.” 고구려 병사들은 일제히 활을 쳐들었다. 일은 다급하게 되었다. 박제상은 들은체 만체 급히 노를 저었다. 복호는 뱃머리에 서서 간절히 외쳤다. “여러분들은 나를 지켜주던 분들이 아니오? 내 처지를 생각하여 잘 살펴 주구료...” 그 병사들은 모두가 복호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애절한 복호의 말을 듣자 마음이 움직였다. 자기들과 친하게 지내던 복호를 차마 활로 쏘아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지못해 활을 쏘는 시늉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화살에는 살촉이 뽑혀 있었기 때문에 배 위에 화살이 빗발치듯이 날랐으나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복호는 배 위에서 마냥 뜨겁게 손을 흔들었다. 병사들은 말 머리를 돌려 고구려로 돌아가고 박제상과 복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노를 저어 신라를 향하여 나갔다. 5월 하순에 박제상은 복호를 데리고 무사히 서라벌 땅에 도착하였다.

“오! 복호야!” “형님! 아니 대왕마마...” 서라벌의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눌지왕은 아우를 보자마자 미칠 듯이 끌어안았다. 10년이 가깝도록 막혀 있던 애정의 물결이 두 형제의 가슴 속에서 뚝이 터진 강물처럼 세차게 소용돌이 쳤다. 두 형제의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그 길로 대궐로 들어간 형제는 성대한 축하 잔치를 열었다. 모든 신하들이 왕 형제의 상봉을 축복하고 박제상의 빛나는 공을 기리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다. 그러자 왕의 얼굴에는 다시 근심의 빛이 어리기 시작하였다. “사랑하는 아우 복호를 만나니 과인은 하늘에라도 날듯이 기쁘오. 그러나 왜국에 있는 막내아우를 생각하면 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소. 지금 나는 몸에 팔 하나 만을 가지고 있고, 얼굴에는 눈 하나만을 가지고 있는 심정이오.” 눌지왕은 탄식을 하듯이 힘없이 말을 했다.
그러자 박제상이 앞으로 나서며 눌지왕에게 아뢰었다.
“소신이 이 길로 왜국으로 건너가 미사흔님을 마저 모셔오겠나이다.” “아니 좀 쉬지도 않고 당장 왜국으로 가겠단 말이요?” “예! 아직 대왕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잠시인들 어찌 쉴 수가 있겠사옵니까? 다만 왜놈들은 얕은꾀가 많고 아주 간사한 무리들이오니 소신의 계획대로 이곳에서 약간의 준비를 시켜 주십시오.” “그런 일은 염려 말고 집에 가서 가족들이나 만나보고 떠나도록 하구료. 그대의 가족들이 지금 서라벌에 와 있소.” “아니옵니다. 왕명을 받은 몸이 어찌 가족을 생각 하오리까?” 눌지왕은 이 말을 듣자 “오! 관연 그대는 나의 어버이와 같소.” 라고 말했다
눌지왕은 감격하여 박제상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구려에서 막 돌아온 박제상은 집에 들릴 사이도 없이 말을 타고 곧장 율포(栗浦=밤개) 해변으로 떠났다. 뒤 늦게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가 밤개 해변에 이르렀을 때 남편은 이미 배위에 올라 있었다. “여보! 여보 잠시라도 집에 들르지도 않고...” 부인은 애절하게 남편을 불렀다. 그러나 박제상은 이미 떠나기 시작한 뱃머리에 우뚝 서서 손을 흔들 뿐이었다. “나는 왕명을 받들고 왜국으로 떠나오. 나의 목숨은 나라에 바쳤으니 나를 다시 만날 생각은 하지 마오!” 박제상은 통곡하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외쳤다. “여보! 부디 잘 다녀 오셔요...” 부인은 마냥 손을 흔들며 울부짖었다.
무정한 바람은 박제상 선생이 타고 있는 배를 멀리 멀리 밀어 보냈다. 이윽고 배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끼욱, 끼욱...” 넓은 바닷가에는 갈매기 떼 만이 슬피 울어댈 뿐이었다. “여보, 여보...” 부인은 배가 사라진 수평선 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만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맥이 탁 풀린 부인은 이제 울 기력조차 없었다. 부인의 친척들이 부축해 가지고 돌아가려 했으나 가다가 중간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선생의 부인이 길게 울던 모래밭을 “장사(長沙)” 라고 하며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던 곳을 “벌치마루”라고 한다.

밤개 해변을 떠난 박제상은 무사히 왜국에 도착했다. 그는 곧 왜국 왕을 찾아갔다. 신라의 새 왕이 소신을 미워하여 부모와 형제를 아무 죄 없이 죽였나이다. 소신에게도 언제 화가 미칠지 몰라 대왕의 따뜻한 보호를 바라고자 이렇게 찾아왔나이다. 박제상은 미리 꾸민 대로 이야기 하였다. 왜국 왕은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신라에 보냈던 간첩들의 말을 듣고 나서 박제상의 말을 곧이 들게 되었다. 눌지왕이 이미 박제상이 계획한대로 모든일을 꾸며 놓았기 때문에 간첩들은 속게 되었다. 왜국 왕은 박제상에게 집과 양식을 주었다.
박제상은 곧 마사흔을 만났다. 두 사람은 그 동안의 사정 이야기를 자세히 나누고 탈출할 기회만을 엿보았다. 박제상은 날마다 바닷가로 나아가서 낚시질을 하거나 산에 올라 사냥을 하였다. 잡은 물고기와 짐승은 왜국 왕에게 갖다 주었다. 이렇게 되자 왜국 왕은 박제상을 믿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바닷가에는 안개가 자욱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바로 열발짝도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 였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데리고 바라로 나갔다. 미사흔을 탈출 시키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미사흔님!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저 배를 타시고 똑바로 신라로 가십시오.” “아니, 그러면 그대는?” “저는 뒤에 남아 왜놈들의 추격을 막아야 합니다.” “어버이 같은 그대를 두고 어찌 나 혼자만 떠날 수 있겠소?” “소신은 이미 나라에 바친 몸 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떠나십시오!” 두 사람은 술을 함께 마시고 울며 헤어졌다.
미사흔은 신라를 향해 안개 낀 바다를 헤쳐 나갔다. 배는 전에 왜국에 잡혀와 있던 강구려라는 신라의 젊은이가 저었다. 박제상은 돌아와 미사흔이 쓰던 방을 들어갔다. 아침이 되자 감시하는 왜병이 찾아왔다. 박제상은 “미사흔님께서 어제 하루 종일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시달리셔서 아직 주무시고 계시니 들어오지 말라” 라고 말하여 왜병을 되돌려 보냈다 한낮이 기울고 저녁이 되자 왜병이 또 찾아왔다. “어찌 이렇게 오래도록 주무시오?” 왜병은 수상 하다는 듯이 물었다. 박제상은 그제야 미사흔이 멀리 떠났으리라 믿어 의연히 대답하였다. “미사흔님은 신라로 떠난 지 벌써 오래되었네.”
이 소식은 곧 왜국 왕에게 알려졌다. 깜짝 놀란 왜국 왕은 급히 군사를 풀어 미사흔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안개 자욱한 바다에서 이미 멀리 떠나간 미사흔을 찾을 수 없었다. 박제상은 왜국 왕의 앞에 끌려나갔다. “네가 어찌 하여 나를 속이고 미사흔을 빼돌려 신라로 보냈느냐!” “신라의 신하인 나는 우리 임금의 뜻을 받을었을 뿐이오!”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지 않았느냐?” “나는 차라리 신라의 천한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고, 차라리 신라의 종아리를 맞을 지언정 왜국의 녹은 먹지 않겠소.” 이에 왜국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저 놈의 발바닥을 벗기고 갈대 밭을 걷게 하라!” 잔인한 왜국 군졸들은 박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갈대 밭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는 이맛살하나 찌푸리지 않고 피가 철철 흐르는 발바닥으로 태연스럽게 갈대 밭을 걸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냐?” 왜국 왕은 다시 물었다. “신라의 신하이오” 박제상은 여전히 태연하였다. 왜국 군졸들은 다시 철판을 불에 달구어 놓고 박제상으로 하여금 철판 위를 걷게 하였다. 그러나 박제상은 역시 태연하기만 하였다. 왜국 왕은 이러한 박제상을 목도(木島)로 귀양 보내어 잔인하게도 장작불 위에 올려놓아 태워 죽이고 말았다. 그 때 박제상의 나이는 57세였다. 죽어가는 순간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도 박제상은 태연하였다.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는 듯이 흔연한 웃음마저 띠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신라여! 부디 번성해다오...” 박제상은 이렇게 외치며 태연히 죽어갔다. 지금도 갈대의 줄기가 빨간 것은 박제상의 피가 맺혀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 후 서라벌에서 남쪽으로 30리가량 떨어져 있는 수리재(치술령:鵄述嶺) 꼭대기에는 매일같이 찾아와 바다 멀리 남쪽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박제상의 부인이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왜국으로 떠나보낸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리재에 올라와 남편의 무사를 빌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남편은 끝내 돌아와 주지 않았다. 남쪽바다 먼 수평선에 못이 박힌 듯한 부인의 눈동자는 눈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눈물은 하염없이 거룩한 그녀의 뺨을 적시고만 있었다.
이렇게 몇 달, 몇일을 두고 수평선 만을 바라보던 부인은 끝내 그 곳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 후 신라 사람들은 그 곳에 돌을 깎아 망부석(望夫石)을 세우고 철마다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 부인을 기리어 “수리재의 신모(神母)”로 받들고 사당을 지었으니 지금도 수리재에는 망부석이 서 있고 사당유지(遺地)가 남아 있다. 맏 따님 아기(阿奇)와 셋째 따님 아경(阿慶)도 역시 모친을 따라 돌아가셨다. 둘째 따님 아영(阿榮)은 통곡하면서 “나마저 죽는다면 어머니와 언니, 동생의 시체는 누가 거두며 남동생 문양(文良=백결선생)은 그 누가 양육할까?” 하고 탄식하면서 차마 순절하지 못했다. 그 후 나라에서는 선생의 부인 김씨에게 정렬부인(貞烈夫人)또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을 추증하고 충렬묘(忠烈廟)와 신모사(神母祠)를 세워 봉안하고 두 따님을 위하여 충렬묘 곁에 쌍정려(雙旌閭)를 세우고 그 곳을 중심으로 사방 100리 안의 토지는 모두 치산서원 위토(位土)로 하사 하였다.

미사흔은 바다를 건너 돌아와 먼저 강구려를 시켜 왕에게 그 사실을 알리었다. 눌지왕은 크게 기뻐하며 백관들에게 명하여 굴헐역(屈歇驛)에 나가 친히 미사흔을 맞아 대궐로 들어오게 하고는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리어 죄수들을 모두 석방 시켰다.
선생을 모시고 갔던 부사(副使) 김철복(金徹復) 공은 타던 말을 끌고 박다진(朴多津)에 이르러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전후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뒤에 통곡하면서 하느님께 축원하기를 “만고 충신 박제상의 사실이 고국에까지 전해지도록 해 주소서.”라고 기원하고 타고 온 말의 입에다 그 혈서를 넣은 후 말에게 타이르기를 “네 비록 미물이지만 박제상 선생의 태양을 꿰뚫는 충절을 모를 이치가 있겠느냐! 이 바다를 무사히 건너가서 이 혈서를 신라에 꼭 전하도록 하여라”라고 말한 후 바다 속에다 말을 몰아넣은 뒤 그 자리에서 칼을 물고 목숨을 끊었다.
말은 그 혈서를 물고 바다를 건너 신라에 돌아 왔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이 돕고 귀신이 도운 기적의 산물이다. 그 때 눌지왕은 두 아우와 함께 우식곡(憂息曲)을 지어 부르면서 하회를 고대하고 있던 차에 말이 대궐문 밖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울다가 즉시 죽었다. 문지기가 깜짝 놀라 즉시 왕의 탑전에 달려가 이 사실을 아뢰었다. 눌지왕은 그 말을 듣고 허겁지겁 뛰어나와 현장에 달려가 보니 바로 선생이 순절 했다는 소식이었다. 눌지왕은 두 아우와 함께 손을 맞잡고 통곡하며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라 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원근 주민들도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시민들도 모두 달려와 울면서 몇 달 동안 시장을 파하였다.
하루는 이상한 새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 전정(殿庭) 마롯대 모서리에서 지저귀며 글자 모양을 쪼아 놓고 날아갔다. 왕께 아뢰어 대신을 시켜 살펴 보게 하였더니 거기에는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왔는데 뉘라서 그걸 알까?”라고 씌어져 있었다. 이것은 선생의 부인 김씨가 넋이 새가 되어 일본 목도에 날아가서 남편의 넋을 모시고 돌아왔다는 한 증거이다. 그 새는 훨훨 날아서 치술령 남쪽 기슭의 바위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눌지왕은 그곳에 영신사(靈神祠)를 창립 하니 후세 사람들이 그 곳을 은을암(蘟乙菴)이라 이름하였으니 지금도 바위틈 옆에 은을암이 서 있다.

눌지왕은 선생의 공로를 기록하여 대아찬(大阿湌)을 추증하고 동명후(東明侯)에 봉했으며 또한 선생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던 부사 김철복에게도 이찬(伊湌)을 추증하였으며 선생이 탔던 말도 치술령 서쪽의 기슭 마명산(馬鳴山)에다 묻어 주었는데 후에 사람들이 그 산을 가리켜 마등산(馬登山)이라 불렀다. 양산 읍내에 위치한 춘추원(春秋園)에 선생의 만고충신비(萬古忠臣碑)가 건립 되어 있고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 있는 효충사(孝忠祠)에서 음력 3월 중정(中丁)에 선생과 그 아드님 휘 문양(文良 = 백결선생) 부자 분을 사림에서 봉사하고 있다.

박제상 선생이 보여준 목숨을 바친 충성심으로 인하여 한 자리에 모이게 된 눌지왕의 3형제는 얼싸안고 기뻐하였다. “오늘에야 우리들 3형제가 비로소 한 자리에 어엿이 모였도다. 이보다 더한 기쁨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모든 기쁨이 오로지 박제상의 충성심 때문이로다. 우리는 백 번 절하여 그를 어버이로 모시자!”
박제상은 이미 작고했지만 그에게는 대아찬(大阿湌)이라는 높은 벼슬이 내려졌고 그의 아내는 국대부인(國大夫人 = 나라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섬겨졌다.
그리고 그 후 막내 아우 미사흔을 박제상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여 은혜의 일부에 보답하였다.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박제상의 충혼은 지금도 우리 겨레의 핏줄 마다 뜨겁게 살아있는 것이다.

위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박제상 선생은 22세 때 간관(諫官)으로 추천되어 왕의 탑전에 가서 관리들이 부정으로 축재하는 폐단을 극렬히 아뢰며 말하기를 “전하께서 위엄은 보이지 않으시고 도리어 은총만 베푸시니 마치 봄은 있어도 가을이 없고 여름은 있어도 겨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신은 듣자오니 천지를 존립(存立)시키는 도리는 음양이라 합니다. 양은 봄과 여름을 맡아서 만물을 양육하고 음은 가을과 겨울을 맡아서 만물을 숙살(肅殺)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상(賞)은 선행을 권하기 위한 것이요, 형(刑)은 악행을 징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은총만 쓰시고 위엄이 없으며 상만 쓰시고 형은 쓰지 않으시니 이것은 천지의 도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하늘의 도가 양육도 하고 숙살도 하여 사시(四時)의 기능이 갖추어진 후라야 세공(歲功)이 이루어지듯이 왕으로서 은총만 쓰시고 형벌을 쓰지 않으시면 어떻게 왕도를 성공시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신이 바른 말 하는 것을 이제 처음 보았노라”하시고 박제상을 보문전태학사(寶文殿太學士)에 승진 시켰다. 박제상 선생이 왕명으로 각 진영을 순찰하시게 되자 탐관오리들은 그 말만 듣고도 벼슬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한 복희씨 이하 우탕주무(寓湯周武)의 천하 다스리던 도를 상세히 아뢰자 상왕은 옛왕을 잊지 못한다는 뜻에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기자묘(箕子廟)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박제상 선행은 24세 때 어사대부간관이 되셨고 27세 때에 종은대부광정보문전이찬(宗殷大夫匡靖寶文殿伊湌)이 되셨으며 34세때 고향인 양산에서 삽량주간(揷良州干)이 되셨다. 40세 때 내물왕(奈勿王)이 돌아가시니 왕의 숙부의 아들인 실성(實聖)이 난을 일으켜 국민들을 위협하였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말하기를 “임금께서 이이 붕어(崩御) 하시고 사자(嗣子) 눌지(訥祗)는 아직 어리오니 원하건데 임금이 되셔서 무고(無辜)한 백성들을 돌보아 주소서”하고 간원 하였다. 그러므로 실성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부터 선생은 벼슬을 내놓고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 등과 같이 10여년 동안 반정(反正)에 노력하였다. 그러자 구신(舊臣)들이 실성을 배반 하므로 눌지가 왕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오윤겸(吳允謙)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사신으로 일본 유방원(流芳阮)에 갔더니 유방원 곁에 의관장(衣冠葬)이 있고 또 비석이 서 있었는데 “계림 충신 박선행 휘제상지묘(鷄林 忠臣 朴先生 諱 堤上之墓)라고 쓰여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경의를 표하였으며 유방원 뒤에는 안덕천황(安德天皇)의 사당이 있었는데 안덕이 어렸을 때 강신(强臣)들에게 쫓기어 여러 차례 싸웠으나 궁지에 몰리게 되어 시녀(侍女)들이 그를 업고 바다에 빠져 죽었으므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면서 선생을 배향(配享)했었다 한다.
또한 왜승(倭僧) 규백방(規白方)이 사신으로 와 그때 사실을 매우 자세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제상 선생이 형장(刑場)에 나가던 날 쇠붙이를 달구던 불꽃이 갑자기 맑은 공중에 번개로 변하여 왜주(倭主)는 정신을 잃은 채 땅 바닥에 거꾸러지고 그 형역(形役)에 정사하던 군졸들이 피를 토하고 죽어 갔으며 다음 해에 또 왜국에서 군사를 이끌고 남침을 시도(試圖)하다가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 몰사하였으므로 왜인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다시는 침략을 꾀하지 못했다.” 이것은 박제상 선생의 영령(英靈)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하여 그의 정의(正義)를 추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공이 그 묘에 “생위계림신사작계림귀(生爲鷄林臣死作鷄林鬼)”라고 썼다 한다. 그 뒤에 또다시 왜군이 신라를 침범할 때 치술령을 넘어오자 선녀 세분이 갑자기 나타나 앞길을 막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처와 두딸이다. 네 놈들이 천리(天理)를 거역하고 무도하게 내 남편을 살해 했으니 내 마땅히 네 놈들을 몰살 시킬 것이다”하고는 사라졌는데 그날 왜놈들이 거의 다 피를 토하고 몰사 하였다 한다.

서울 남산공원의 김구 선생의 동상 뒷면에 있는 “나의 소원”이라는 글을 보면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 선생이 “내가 차라리 신라의 개, 돼지가 될 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노라”라고 말한 것은 그의 진정이었던 것이다. 박제상 선생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들을 준다는 것도 모두 물리치고 죽음을 달게 받았던 것이니 그것은 차라리 “죽어가서 내 나라의 귀신이라도 되겠소”라는 뜻이었다. “과연 천고에 서릿발 돋는 교훈이었다”라고 쓰여져 있다.
충렬공은 만고 충신이요, 국대부인 김씨는 열부요, 장녀 아기, 삼녀 아경은 열녀요, 이녀 아영은 효녀로서 일문사절(一門四節)이란 우리 영박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사실이다. 충렬공께서 태어나신 양산 춘추원에는 “만고충신 박제상지비”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 역시 고금을 통해서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학술연구를 통해서 발표된바 있다. 치산서원은 신라 중엽에 창건되어 몇 번에 걸쳐 증건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러나 폐허 연대는 알수 없다. 1988년 경주 최상호(崔翔浩=당시 두동면의 우체국장) 장보(章甫)가 유림들의 뜻에 따라 성역화 추진 위원장으로 발탁되어 국고지원금 5억 2천만원과 본 손(孫) 및 유림들의 성금으로 1989년 6월에 기공하여 1991년 가을에 준공하고 같은 해 11월에 봉안식을 가졌다. 위치는 옛 유허지 인 울산군 두동면 만화리산 30~2번지이고 부지는 3,127평, 주위 조경지는 1,500평에 13동 목조 건물을 원형 그대로 중건하고 지방 기념물 90호로 지정되어 충렬공, 국대부인 김교 김씨, 장녀 아기, 삼녀 아경 4위를 봉안하고 매년 2월 중정을 택하여 사림 봉사하고 있다.

1999년 1월 일
영해박씨 송촌공파 종친회
시종조 58세손 朴大熙 펴냄


백결 박선생(百潔朴先生) 연보(年譜)

- 서기414년 충렬공 시종조의 장자로 삽량주 수두리(梁山郡 上北面 所土里 孝忠谷)에서 탄생하시다
- 서기 418년(5세)에 부친께서 왜국에 볼모로 잡혀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출하려고 신라의 특사로 왜국에 건너갔다가 순절하시니, 선생의 모친 김씨는 치술령에서 순사하시고 큰 누이 아기와 셋째 누이 아경은 모친을 따라 순절하시니 선생은 둘째 누이 아영에게 양육되시다
- 둘째누이 아영이 왕명에 의하여 공자 미사흔에게 출가하니 선생은 다시 궁중(宮中)에서 보육(保育)되시다
- 선생은 각간 이수현(李壽玄)의 따님과 결혼하고 눌지 왕조에서 수년간 입조(立朝)하다가 고향인 양산으로 돌아와서 문호(門戶)를 닦으시다
- 조정에 있을 때 받은 봉록(俸祿)은 사용(私用)하지 않고 말씀하시되 “이 봉록은 나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조상의 소치(所致)”라고 하시고 전부 선영을 위해 쓰고 빈궁한 생애를 택하시다
- 선생이 식사를 자주 궐(闕)하고 의복이 남루하여 수없이 꿰매어 입으니 향리에서는 백결(百潔)이라고 자호(自號)하다
- 선생이 평생 거문고와 글을 좋아하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회포를 모두 거문고로 풀었는데, 하루는 부인이 이웃집에서 떡방아 찢는 소리를 듣고 겨울을 넘길 식량이 없음을 한탄하니 선생은 거문고로 방아 찢는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하시다
- 거문고 곡조는 대악(碓樂)이라 하여 후세에 전해지고 있으니, 이것이 오늘날 “방아타령”으로 전해진다
- 서기 478년(64세)에 자비왕(慈悲王)이 이벌찬예부시랑(伊伐湌禮部侍郞)의 직책에 임명하여 백결 선생이 입조(入朝)하여보니 왜인들이 조정에 가득하고 치정(治政)에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충애심(忠愛心)이 간절하여 천재(天災), 치경(治境), 여인(輿人), 지인(知人), 화인(化人)등 6장의 상소문을 올리고 곧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시다
- 벼슬을 내놓고 귀향할 때 귀향곡을 지어 거문고를 타니 후세에 이 귀향곡은 낙천악(樂天樂)으로 전해졌다
- 선생이 귀향한 후 조정에서 루차 징소(累次 徵召)하였으나 나가지 않으므로 왕이 그 마을에 국가시책으로 금하고 있는 모든 것을 특명으로 철폐하여 선생을 자유롭게 하니 당세 사람들이 그 곳을 물금리(勿禁里)라 하다
- 국가로부터 보내오는 물품을 일체 사절하고 몸소 농사를 지어 겨우 호구(糊口)하다
- 선생이 부친의 유업을 이어 금척지(金尺誌)를 저술하다
- 후인들이 백결학사(百潔學舍)를 세워 선생의 유풍(遺風)을 전하고 라조(羅朝)에서는 대령군(大靈君)을 추봉하다


백결(百潔) 박문양 선생(朴文良 先生) 사적(事蹟)

선생은 충렬공 제상(堤上)의 1남 3년 중 독자로 서기414년 양산군 상북면 효충동에서 태어나시니, 취는 문양(文良) 또는 루랑(婁琅)이요 호는 백결(百潔)이시니 5세때 부친께서 왜국에서 순국하시고, 모친께서는 치술령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왜국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순절하시고, 큰누이 아기, 셋째누이 아경 역시 모친을 따라 순사하시자 둘째누이 아영에게 양육되셨다. 자비왕(慈悲王) 때 이척찬예부시랑(伊尺湌禮部侍郞)을 지내셨고 대령군(大寧君)에 추봉되셨다.
고려때 죽송오서진(竹松塢徐薽)이 말하기를 신라 인물로 세상을 피하여 숨은 분이 적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곤궁한 처지에서도 참된 즐거움을 가졌던분은 누구일까?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말하기를 눌지왕때 왜국에 들어가 순국했던 삽량주 박제상의 아들 문량이 자비왕을 섬기면서 천재(天災)로 인하여 상소했는데, 선생은 “천도(天道)란 말없는 가운데 사람을 덕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재앙으로서 군왕의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 마치 스승이 착한 길을 열어주고 허물을 막기 위하여 회초리와 꾸짖음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임금이 만일 하늘의 재앙에 경각심을 가져 정도(正道)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행히 천재를 봄으로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잘못된 제도를 고쳐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자기도리를 자기가 잃어 버리면 천재마저도 나타나지 않게 되는데 그것은 천재 중에서도 제일 큰 천재로서 재앙 없는 것이 재앙이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반드시 재앙을 보이는 것이지 사람에게 재앙을 주기 위하여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 하늘 마음대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또 “천도(天道)란 말 없이 운행하면서 사람을 인도하여 감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재앙을 내려서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마치 스승이 착한 길을 열어주고 허물을 방지하기 위하여 회초리와 꾸짖음으로 엄하게 지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임금이 만일 깨우쳐서 정당한 길로 돌아온다면 그것은 천재(天災)를 당함으로써 사람의 복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므로 하늘이 재앙을 보이는 것이 바로 사람의 재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임금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린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밀림(密林)속에서 자란 나무는 먹줄을 받지 않아도 저절로 곧고 가시밭 속에 난초가 있으면 처버리지 않아도 저절로 말라 죽나니 임금은 몸가짐이 잘못되었느냐, 올바르냐, 어지냐, 어리석으냐의 사이에 있게 되어 이렇게 하면 어떤가 하는 가운데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 혼자서 기쁜 것은 악(惡)이요 내마음에 공(公)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다 의(義)인 것입니다. 혼자서 기쁜 일도 그를 함께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뜻을 받고 아당을 쳐서 유순하게 따라오는 것이요 공으로 즐기는 일에도 그를 함께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뜻을 헤아려 선(善)을 향하여 인도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즐기는 일에는 따라오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만 실은 적은 것 입니다. 왜냐? 특별한 사람은 언제나 적고 보통사람은 언제나 많은 것인데 조정에 있는 사람이라 하여 어찌 멀거니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자기에 유리하도록 하려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므로 세상에 오른 사람이나 그른 사람이나 누가 그렇지 않을 것입니까? 그렇다면 조정에서 임금의 뜻에 맞춰 따라 기뻐하거나 위에서 눌려 기쁜체 하거나 하여 이익을 자기가 차지하는 자가 많을 것 같지만 시골에 있는 백성의 뜻을 거스림으로서만 자기의 욕망을 채울수 있을것이니 그렇고 보면 백성들은 반드시 참여하지 않을 것이므로 백성이 참여하지 않으니 실은 적은 것이요, 공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따르는 사람이 적은 것 같지만 실은 많은 것입니다. 왜? 누구나 인(仁)은 좋아하고 해(害)는 싫어하는 것이므로 백성들이라 하여 어떻게 속일 것 입니까? 은혜를 가꾸고 덕을 좋아하는 것이 역시 사람의 상정이므로 다 살기를 좋아하고 유리한데로 나가려 하는데 누가 그렇지 않을것입니까? 그렇다면 조정에서 씩씩하고 독특하게 위엄을 범하고 뜻을 거슬려 이익을 임금께 돌리는자가 적은 것 같지만 시골에 있는 백성의 뜻을 순하게 받아드려야 위기를 넘길수 있을것이니 그렇고보면 백성들이 반듯이 앞을 다투어 참여할 것이므로 백성이 다투어 참여하니 실은 많은 것입니다.
군자는 언제나 강강(剛剛)하고 똑바로 서서 기울지 않고 소인은 언제나 유유(柔柔)하고 기울어져 똑바르지 못하므로 내 마음을 괴롭히고 거슬리는 자는 모두다 충신이요 내 마음을 기쁘게 하고 따르는 자는 모두 다 아첨하는 도적인 것입니다”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대인도 임금을 위하여 유리하도록 하고 소인 역시 임금을 위하여 유리하게 한다고 하니, 한다는 것이 같아서 구별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사람을 알아보기란 쉬운 것이어서 바른 사람은 언제나 바른말을 하여 자기 위험을 돌보지 않으므로 정당(正黨)으로서 똑바로 서고 똑바로 말하며 기울지 않고 자신을 굽히지 않으며 바르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안이(安易)한 말로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므로 사당(邪黨)으로서 아첨하는 뜻과 아첨하는 말로 사랑을 구하고 임금을 즐겁게 하기에만 힘쓰는 것이니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을 취하는 법이 그 사이에 왔다갔다 할 뿐인 것입니다” 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임금이 임금 노릇하는 도리가 오직 백성을 기르는데 있으니 임금이 아당하는 것을 좋아하면 임금 곁에서 보필을 맡아보는 신하들이 따라서 자기 평소의 마음을 버리고 소인이 되어서 임금을 망치고 임금이 곧은 것을 좋아하면 소인이 될 신하들도 자기의 거스리는 도리를 버리고 옳은 사람이 되어서 임금에게 충성할 것이니 임금노릇하는 방법이 여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견해가 조정과 맞지 않고 또 당국자에게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당시 풍속은 장사를 지낼 때 봉분을 만들지 않았었는데 선생은 혼자서 고집하기를 “우리집안의 봉록(俸祿)은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선대의 공적으로 받게 된 것이다”하고는 봉록을 모두 내놓아 봉분을 만드는데 쓰게 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도 청빈하였지만 벼슬을 버리자 더욱 가난하여 옷 한 벌을 백 군데나 기여 입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하였다. 평소 영리를 좋아하지 않고 언제나 거문고를 들고 다니며 슬프거나 기쁘거나 반드시 거문고를 튕겨 마음을 풀었고 혹시 불평한 일이 있을 때면 역시 거문고 가락에 실어 마음을 달랬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곡조를 만들어 거문고에 싣기를 “하늘이 사람을 내시고 하늘이 사람을 궁(窮)하게도, 현(顯)하게도 하고 하늘이 임금을 얻게 하고, 하늘이 임금을 잃게도 하시네. 얻었다고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닌데, 잃었다고 슬퍼할게 무엇인가! 벼슬길이라고 좋아 할게 무엇이며 벼슬을 떠난다고 불만할 것이 무엇인가! 즐거워야 별것도 아니요 자연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즐거움이네” 하였다.

한해가 저물어가자 이웃 마을에서 절구질을 하는데 그의 아내가 절구소리를 듣고 하는 말이 “남들은 다 곡식이 있어 절구질을 하는데 우리만 없으니 무엇으로 설을 보낼까?” 하니 선생이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라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을 따를 수도 없는 것인데 슬퍼할게 무엇인가?” 하고는 거문고로 절구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 하였는데 세상에는 그 곡조를 대악(碓樂:“방아타령”)이라 하였다.
선생은 도덕과 도량, 그리고 뛰어난 재간을 가지고도 시대를 잘못 만나서 그 빛나는 공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높고 넓은 하늘 땅 밑에 효성을 바칠 곳이 없었으니 높은 벼슬을 하여 많은 녹을 받은들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마음에서 집이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마음은 더욱 편안하였고 육신(肉身)은 궁하여도 즐거움만은 그대로 있어 비록 끼니를 잇지 못하고 너덜거리는 옷을 걸치고도 여유가 있는 마음으로 원망이나 뉘우침이 없이 일생을 마쳤으니 참으로 인류의 사이에서 자기 할 바를 다한 분이라 할 수 있고, 또 천명을 알고 도를 즐기는 군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선생은 만고 충신인 관설당의 대를 이었고 또 왕의 외척의 집안이었으니 부귀와 영화가 당연히 뒤따르게 되었지만 그것을 헌신짝 썩은 쥐처럼 버렸고 설이나 명절을 당하면 육부대신들의 진수성찬을 즐기는 집안에서는 노래와 쇠북 소리가 들끓었지만 선생은 홀로 거문고 하나를 안고 찬 바람이는 부엌, 허물어진 집 속에서 거문고를 벗하여 시름을 달랬으니 참으로 그 기상이 어떠했으며 그 흉금이 어떠했는가?
그 마음이 이 세상 모든 물건을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부귀 빈천과 사생영욕(死生榮辱)이 나의 털끝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환경과 처지였으니 도의(道義)가 마음에 훤하고 물욕이 깨끗이 없어져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이 도학(道學)이 몸에 배어 가슴 속에 여유가 있는 참 즐거움을 가진 분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그렇게 했겠는가? 운곤 원선생(耘谷 元先生=고려의 수절신 휘는 천석)이 주장한 “신라시대 세상을 피하여 숨은 사람중에서 백결선생만이 궁한 처지에서 참 즐거움을 얻었다.” 한말과 운월제 신선생(雲月齊 申先生=고려 때 대학자로 관은 평산이고 휘는 현(賢)임)이 주장한 “신라시대 인물로 광명정대(光明正大)하기는 김양(金陽=신라 신무왕 때 공신) 같은 이가 없고 영웅 호걸로는 김유신(金庾信=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신라의 명장으로 무열왕때 5만 군사를 인솔하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문무왕때 고구려를 토평(討平)했음) 같은 이가 없다지만 백결선생은 그를 모두 겸했다”라고 한 말들이 참으로 사리가 통하는 말이다.

선생의 그 충과 효가 다 지극하고 궁(窮)과 달(達)을 평등하게 생각하며 정대하고 성실하고 맑고 깨끗하기가 중국과 우리나라를 통틀어 찾아보아도 사실 선생과 짝할 사람이 드물어서 예나 지금에도 비슷한 분이 없다 하겠다. 아! 선생의 남겨놓은 남은 풍채와 운치가 모든 사람을 감동시켜 백세뒤에도 이렇게 흥기(興起)시키고 있는데 저 물정(物情)에 어두웠던 신라 임금은 이러한 신하를 두고도 그의 말을 들어 쓰지 못하였고 그 때 저작자들 역시 선생을 위하여 저서(著書)를 남겨서 뒤 세상을 깨우치지 못하였으니 신라의 정치와 문헌(文獻)이 모두 비루하고 소략하여 후세에 선생의 얼을 평론하는 이들의 개탄을 자아내 마땅하다 하겠다.
지금 나사(羅史)를 살펴보면 다만 선생의 대악(碓樂)에 관한 한가지 사실이 기록되었을 뿐 이름도 성씨도 빠져있고 기타 야승(野乘=민간에서 사사로 지은 역사)이나 패설(稗說=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역시 덩달아 빠뜨려져 비록 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라도 백결선생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에 대한 기록을 진성신씨(眞城申氏)의 집에 간직되어 있던 화해사전(華海師全=신 문정공의 전서) 속에서 찾아 내었다. 그제서야 선생의 세계(世系)와 사적이 소상하게 나타나 박씨 제종들도 그에 대한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 위대한 자취의 나타나고 숨겨짐도 다 때가 있는 모양이다.
영가 권상익(永嘉 權相翊)이 말씀하기를 “관설당 부자분의 사적을 보면 충렬공이 고구려 왕을 달랠 때 패도(覇道)를 배척하고 성신(誠信)을 주장했던 그 자체가 바로 신라시대 제일가는 식견이었는데도 후세의 언론자들이 거기에 대하여 발명해낸 것이 전혀 없고 운계(雲溪), 치산(致山) 두 서원에서 충렬공을 향사하고 여러 어진 후손을 배향하여 대를 이은 아름다움을 밝혀내면서도 백결선생 만은 거기에서 빠졌으니 지금에 와서 본다면 그것이 또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사적의 편찬을 상세하게 홍보하지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를 인쇄하여 전국에 널리 알림으로써 지금 세상의 남의 신하, 남의 자식, 남의 남편, 남의 아내가 된 자들을 깨우친다면 그것이 참으로 풍습을 잘 교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백결선생의 사적은 화해사전(華海師全)에 자세히 실려 있다.


상계혈통(上系血統)에 대하여 드리는 말씀
옛날부터 전해오는 문헌고증에 의하여 범 박종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조금도 오해하지 마시고 참고로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일성왕(逸聖王)을 유리왕(儒理王)의 장자(長子)라고 친다면 아우라는 파사왕(婆娑王)과 그의 태자 지마왕(祗摩王)의 두 세대가 지나도록 부질없이 92세가 되었다면 사실로 체력적이나 정신적 생리원칙에 의하여 도저히 왕위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마왕의 태자 이비공(伊非公)을 물리치고 7세 왕이 되었으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불 보듯이 뻔한 사실인 것이다.

2. 밀양종(密陽宗)의 족보에 의하면 일성왕이 서기 44년에 탄생하여 134년에 즉위하고 154년에 훙(薨)하셨다 하였으니 아우 파사왕이 33년간 재위하시고 조카 지마왕이 23년간 재위하시도록 부질없이 왕자(王子)로 계시다가 90여세에 이르러서야 태자가 되어 21년간 재위하셨다가 111세에 서거(逝去)하셨다면 이것은 전연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신라 박씨의 후예가 된 자는 범박(汎朴)의 명예를 위하여 위로 조상의 영영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고 아래로 후세에 조소(嘲笑)를 면하도록 할 것을 종용(慫慂)하는 바입니다.
다음 동사연표(東史年表)와 밀양보(密陽譜)의 기록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99년 2월 일

영해박씨 송촌공파 종친회

시조왕 혁거세 66세손 대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