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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목도 탐방기
작성자 박한진 작성일 2008.05.13
파일 0139.jpg 0072.jpg 0080.jpg 0085.jpg 0092.jpg 0080(2).jpg 조회수 13825

 

木島訪問記

나는 08년4월16일부터 3일간 목도를 다녀왔읍니다.

木島는 觀雪堂할아버지가 혹독한 고문에 항거하며 신라의 신하임을 절규하면서 순국한곳으로 전해져 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1.고려시대에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서 觀雪堂이 木島에서 순국 했다고 명시(寧朴大譜 38P참조)

2.고려시대에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에서 觀雪堂이 木島에서 순국했다고  명시  (寧朴大譜 36P참조)

3. 1977년에 아동문학가 이종기(李鍾埼)씨가 수차 현지 방문하여  木島가 觀雪堂의 순국지임을 확인(세계일보 일본판(77.9.27부터 20회 연재) 

4. 조선일보 칼럼을 쓴 이규태씨는 목도가 관설당 순국지가 확실하니  현지에 비를 세우자고 주장(1987.5,2일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5. 寧海朴氏大宗會長 박성수씨가 2008년1월에 간행한 충열공실기 32P에서 관설당이 木島에서 순국했다고 명시

6. 한빛신문(凡朴) 11호(2008년2월호)에서 관설당 목도순국을 명시 등 여러 문헌에서 명확히 하고 있어서 木島가 관설당의 순국지임을 의심할 나위가 는 없는데도 그동안 우리 영박 대종회나 영박 만종중 누구도 현지를 답사하여 글을 올린 것을 못 보았읍니다.(만약 나의 이러한 단견이 잘못 된것이라면 그런분에게 정중히 사과 드리겠읍니다)

 이러한 생각은 1999년 11월에 소위 대마도 순국비라는 것을 참배하고 돌아와서 즉시 했어야 하는데 족보 공부를 깊이 있게 못해서 木島가 觀雪堂의 순국자라는 것을 나의 굳건한 지식으로 자각을 못하고  재작년에야 재 인식을 하고서 여러문헌으로 확인하는 한편 현지정보도 알아보며 준비를 하여 이번 비로소 다녀 왔읍니다.

 방문은 본인을 위시해서 대종회 부회장 박범진, 중안위원 박진호 3명이 였으며 순수하게 개인 자격의 방문이 였읍니다.

      

木島가 觀雪堂의 순국지라 며 는 대마도의 순국비는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그점은 본문 끝 부분에서 본인 생각을 말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觀雪堂 순국지로서의 목도에 관해서 우선 말 하겠읍니다.

 무릇 역사상의 사실이라는 것은 그 진실성을 입증하기 어렵고 입증 한다고 해도 모두가 공감하기는 더 더욱 어렵습니다. 觀雪堂의 순국지에 대해서도 똑 같다고 봅니다. 1,600여년전에 있었든 그 사실을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기록해서 전해 오고 있는데 우리 寧朴으로서는 그 사실을 역사적으로 연구하여 입증할 능력도 입장도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우리는 조상 대대로 전헤오는 내용을 자손된 자의 도리로서 종교적인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 드리면 됩니다. 왈가 왈부하는  불효자가 되여서는 않 된다고 생각합니다.    

木島를 찾아 간것도 그러한 전제하의 것이였으며 새삼 내가 찾아가는 木島가 觀雪堂께서 순국하신 곳이 맞느냐를 확인하러 간 것이 아니라 어디 있느냐를 확인하러 간것입니다. 1977년에 이종기라는 아동문학가가 역사탐방가의 열의로서 木島가 관설당의 순국지가 맞다 하고 고증을 하여 줌으로서 우리 寧朴이 스천년 지녀온 그 기록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고 생각하고 방문하러 갈수가 있었읍니다.

  

 木島는 日本 九州땅 쿠마모토현(熊本縣) 아시키타군(芦北郡)) 앞 바다 위, 육지 가까이에  있읍니다. 직경 100m 남짓의 조그만 섬이 여서 큰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주한 일본대사관 공보원에 가서 구마마토현(熊本縣) 지도를 찾아 보니까 깨알만 하게 木島라고 표시된 소도가 보였읍니다.  

  *삽화1 (부산-시모노세끼-목도 연결 지도).


                의관묘를 찾아서 

봄 기후도 화창하여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下關)에 아침 일찍 도착하여 그곳으로부터는 기차를 타고 아시키타군(芦北郡)까지 갔으며 그 다음부터는 관광가이드를 겸하는 기사의 택시를 타고 목도앞까지 가서 일대를 돌아 보고 귀국 했읍니다.  


내가 묵적으로 하여 간 곳은 물론 木島입니다.

그러나 먼저 가 볼곳이 있었읍니다.

우리 대보(丁卯大譜) 36p 야사척실(일운 유방원사적) 은 1672년 2차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든 오윤겸(吳允謙)이 유방원에 觀雪堂의 의관묘(衣冠墓)가 있어서 글을 올리고 참배했다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유방원은 일본 38대 안덕천황을 모신 사당이라고 해읍니다. 그게 지금은 세월의 변화에 실려 아까마신궁(赤間神宮)이라는 이름으로 변해 있었으나 위치가 바뀐일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관설당의 의관묘가 있는지 아니면 흔적이라도 남이있는지 궁굼해서 시모노쎄끼(下關)에 도차 즉시 찾아갔읍니다. 아까마신궁(赤間神宮)은 시모노세끼(下關)부두에서 택시로 10분거리의 해변에 있었읍니다. 신궁 최고책임자인 궁사(宮司) 미스노(水野直房)씨를 찾아보고 뜻을 말하니까 오윤겸이 2차통신사로 일본에 왔을때 이곳에 머문 것은 사실이나 그분이 말 했다는 의관묘는 유적도 들은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4백년 세월 저편의 일입니다.  사명당을 위시한 옛 한국인들의 유품만 구경하고 돌아 섰읍니다.     

         삽화2.赤間神宮 宮司와 찍은 사진 .


                    木島 로

초행길 이고 기차를 몇 번 갈아타고 가느라 시간이 걸려서  해 질녁에야 겨우 구마모토현(熊本縣) 아시기타군(芦北郡)에 도착했읍니다. 과히 불편없는 시골 호텔에서 자고 아침에 기차역으로 가서 택시를 잡았읍니다.  시골의 택시기사는 직능상 관광가이드를 겸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탄 택시기사 이노데(井出勝己)씨도 나의 방문목적을 듣더니 스스로 길을 잡아 목도를 향해 질주하며 여러 가지를 말해 줬읍니다.

 일차목표는 미쓰지마해수욕장(三島海水浴場)으로 정했읍니다. 1977년에 이종기씨가 그곳에서 배를 빌려 타고 木島까지 갔다 왔다는 기록을 봤기 때문입니다. 근처까지 갔을때 앞이 훤히 트이며 바다위에 섬 세 개가 나란히 눈앞에 전개 되였읍니다.

         * 삼도 파노라마 사진  삽화


木島는 중간에 있는 섬으로 정상에 수백년된 큰 나무들이 하늘을 이고 서있는 것이 원경으로 아름답게 보였지만 동시에 저곳에서 觀雪堂은 모진 고문끝에 화형을 당한곳이 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꽉 차 왔읍니다. 몇집 않되는 길가 어촌에서 밖에 나와있는 중년부부를 만났읍니다. 목도를 찾아간다고 했드니 그 무서운곳에는 왜 가느냐 하는겁니다.  내 설명을 듯고서 오늘은 풍랑이 심해서 목도로 갈 배를 댈수 없다고 하기에 해변에서 수백미터거리의 木島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읍니다.

 자동차로 주변을 왕래하며 살펴 봤읍니다. 이종기씨는 수차 이곳을 방문하여 木島는 그 옆의 죽도와 같이 옛날부터 범죄자나 행려병자를 묻은곳이며 고총(옛무덤)이 많고 木島정산에서 고대의 돌 화살촉을 발견하기도 했읍니다. 금칠을 한 목각신상을 봉안한 사당이 있었다는 증언을 들었고, 관설당을 참살한 일본왕 징구고고(神功王后)가 교도마리(京泊) 행소에서 가메무리(釜村)로 건너왔었다는 증언도 얻었고, 가메무라(釜村)에는 해변에 갈대가 무성 했고 동네아름도 옛날에 소금을 굽던 큰 가마가 있었다고 해서 가메무라(釜村)이 됐다는 것도 수집했읍니다. 인근에 있는 온나지나신궁(女島神宮)과 그 옆의 조그만 사당은 징주고고(神功王后)와 그의 최고위 대신이였든 다께우찌스쿠네(竹內宿彌)를 모시고 있는 신당이며 일본역사에서 관설당을 처형했다고 말하는 가쓰라기소쓰히꼬(葛城津蘇彦)의 사당도 이곳에 있었다는등 觀雪堂을 가메무라(釜村)에서 고문하고 木島에서 소살했다는 움직일수 없는 여러 정황을 보고 느끼며 나도 지나며 멈추며 가슴을 적시였습니다.   

길가 편편한곳을 찾아 갖이고 간 주과포를 신문지에 펼처놓고 셋이 눈물울 흘리면서 삼잔삼배를 했읍니다.   

                 * 요배하는 사진 삽화


 돌아오는길에 쓰나기(津奈木)동사무소가 있기에 관광담당공무원 나까야마(中山忠)씨를 만나서 왔다 가는 목적을 이야기 하고 어쩌면 가까운 시일에 또 올른지도 모른다고 했읍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 할아버지를 참살한 사람이 일본의 누구이건 그것은 상관없다. 다만  1600년전에 순국하신 우리 조상 할아버지의 영혼이 목도에 머물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로 온것이다. 이것은 마치 2차대전때 무수한 장병이 전사한 사이판도를 찾는 일본인의 심정과 유사 하다고 보면 된다. 남의 집에 몰래 들렸다 가는 기분이 들어서 이렇게 이르고 간다. 고 그 정도만 이야기하고 왔읍니다.   


앞부분에서 언급한 대마도 순국비에 대한 나의 견해는 한마디로 일본사람들의 입장에서 본 관설당의 순국지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일본은 일본서기라는 일본이 절대 신봉하는 역사서를 갖이고 있읍니다. 거기에 觀雪堂의 사적이 기록돼 있는데 신라인 모마리치(毛麻利智)등 3인이 왕자 미사흠을 대마도 사비노우미(鉏海)에서 도망시킨 죄로 부장 가쓰라기소쓰히꼬(葛城蘇津彦)가 불에 태워 죽였다고 기록돼 있읍니다. 모마리치는 觀雪堂입니다.

 우리역사서에서 말하는 觀雪堂을 소살한 일본왕 징구고고(神功王后)는 지금 일본왕가의 직계조상입니다.

觀雪堂 木島 순국설은 이종기씨가 세계일보(일본판)에 연재하고 부터 일본 식자들 사이에서 의당 문제가 됐을 것 입니다.      

 한국에서는 이종기씨의 기사가 나간후부터 목도순국비 의견이 장기간 나 돈 듯하며 결국 1987년 5월2일 조선일보 이규태코너에 木島에 순국비를 세우자는 글이 실렸읍니다. 다급해진 일본측은 대마도 역사학자 나가도메(永留久惠)가 주동이 돼서 한국의 황수영을 위원장으로한 소위 대마도순국선열현장회라는 것을 결성하고 같은 달 즉 5월8일에 중앙일보등 일간지에 보도했읍니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의 모금으로 순국비를 세웠읍니다. (비석뒷면에 명단 조각). 대마도순국선열현장회라는 단체는 한국에서 찾지 못했읍니다. 한국측 관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대마도 순국비라는 것을 우리 영박으로서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이제 중의로 논의할때가 됐읍니다.  누가 세웠건 이왕 만들어 놓았으니 그대로 인정할것인가. 아니면 조상대대로 못 박아 놓은 木島의 정론에 따라 자손으로서의 도리를 다 할것이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3명이 주차장에서 찍은 목도 사진.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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