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대종회 안내 대종회 소식 대종회 역사 대종회 갤러리 친목 · 문화의장 인터넷 족보
 
 
 
HOME 친목·문화의장 자유게시판
친목·문화의장
자유게시판
족보관련 게시판
애경사게시판
문의게시판
자유게시판

제목 박제상 祖의 맏아들 백결선생 박문량의 삶은?
작성자 박중열 작성일 2015.12.13
파일 조회수 1200

백결선생 박문량은 新羅(신라) 實聖王(실성왕)13년 甲寅年(서기414년) 觀雪堂(관설당) 박제상 선생의 장자로써 삽량주(歃良州)수두리(지금의 경남 양산군 소토리) 효충동(孝忠洞)에서 탄생하고 어릴때의 이름은 효원(孝元)이었다.

어릴 때 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한 박문량은 신라 눌지왕(訥祗王)이 왕위에 오른지 2년. 박문량이 5세때일 때 그의 부친이신 박제상은 일본에 건너가서 인질로 붙잡혀있는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하고 순국하시니 어머니이신 국대부인 김씨는 치술령에 올라가 낭군이 돌아오기를 한없이 기다리시다가 애절히세상을 떠나니 누나 박아기(朴阿奇)와 막네 여동생 아경(阿慶)도 함께 아버지 박제상을 기리다가 어머니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백결선생은 궁액중(궁액:궁중에서 보살펴주는 여인)중에서 보살핌을 받고 또 거기서 공부도 하였다.(영가 권상한 선생의 글에 근거)

다행히 살아남은 가운데 누이 아영(阿榮)은 왕명에 의하여 눌지왕의 아우 왕자 미사흔과 결혼한 후 백결선생은 궁중에서 보살핌을 받고 공부도 하였다.

자라서 백결선생은 각간(角干) 이수현(李壽玄)의 딸과 결혼하고 신라 눌지왕때 수년간 왕궁에서 근무하시다가 고향 양산(梁山)에 돌아와서 가정을 가꾸고 후학을 배출하는데 공헌하시었다.

백결선생은 눌지왕때 궁궐에서 받은 봉록(월급)을 사용하지 않고 말하시기를 이 봉록(俸祿)은 나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조상의 후광과 덕으로 얻은 것이니 내 개인 사용으로 할 수 없다 시며 받으신 봉록 전부를 고향의 문중에 사용하시고 백결선생은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시었다.

백결선생은 강직하고 결백하며 청렴한 생활이 몸에 깊이 베이신 것이다.

워낙 가난하고 어렵게 생활하신 선생은 옷을 수차례 기워 입으시고 빗끄러매여 입으시고 끼니도 거르시기가 다반사였으니 이웃 사람들이 선생을 백결(百結)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선생은 스스로 호를 백결(百潔)이라고 부르시었다고 김시습(金時習)선생은 말했다.

선생은 평소 글쓰기와 독서를 즐기시고 또한 탄금(彈琴:거문고나 가야금)연주로 희로애락의 회포를 풀었다 . 하루는 설날이 다가오자 이웃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선생의 부인께서 큰 한숨을 내시며

"우리는 곡식이 없어 떡방아를 찧을 수 없는 형편이니 이를 어찌할꼬"? 하며

긴 한숨을 내시자 백결선생은

 "사람의 살고 죽음은 목숨에 달려있고 부귀(富貴)는 하늘(在天)에 달려있다" 시며 탄금(彈琴)으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 하였다.(신라급 동경지에 근거)

이때 연주하신 떡방아소리는 오래 동안 후대에 전해지고 이 노래를 방아타령이라 한다.

백결선생이 65세 때 자비왕 즉위 21년(서기478년)에 신라의 17관등 중 최고로 높은 이벌찬(伊伐飡)을 재수 받고 벼슬길에 올랐으나 궁중에서 나라일 걱정은 않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아첨하는 무리가 많음을 보고

천재(天災),치폐(致斃),차경(處境),흥인(興人),지인(知人),화인(化人)등 6장의 상소(上疏)문을  올리고

선생께서는 당시 최고위 벼슬인 이벌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오시었다(원천석 선생 글에서) 선생의 상소문 하나를 소개하면

 “ 빽빽한 숲속에 나무가 있으면 묶지 않아도 곧게 자라고 빽빽한 덤불속에 난초가 자라면 베지 않아도 시든다” 고 하여 나라의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간하시었다.

백결선생이 고향에 귀향하여 후학도를 육성하고 글쓰기로 소일 하실 적에 자비왕(慈悲王)은 수차에 걸쳐 궁으로 돌아오기를 권하였으나 백결선생 박문량은 거부하자 왕은 선생이 자유롭게 소일 할 수 있도록 특별히 명을 하달하시자 세칭 이곳을 물금리(勿禁里)라 하였다(김시습선생 글)

선생의 생활은 매우 청빈하였다. 궁중에서 보내온 곡식과 옷감은 전혀 받지 않고 되돌려 보내시고 직접 경작한 곡식으로 어렵고 매우 가난한 삶을 사시면서 부친 박제상(朴堤上)의 유업을 이어서 금척지(金尺誌: 박제상이 쓴 징심록에 백결선생의 글을 넣은 것)를 기록하시었다.

백결선생은 부친 박제상의 징심록을 중히 여기고 보완 하여 단군인검의 태고의 생성과 형성을 황금척으로 표시하고 또한 민족전래(民族傳來)인 대인국기풍을 크게 진작하고 루랑(婁琅)이라 불렀다.

신라에서는 백결선생의 덕을 칭송하고 대녕군(大寧君)을 봉하였다.

운월재(雲月齎) 신정문(申文貞)선생은 신라의 인물중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 호걸은 김유신(金庾信)이요 광명정대(光明正大)는 김양(金(김)陽(양))인데 백결선생은 이 양자를 겸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글 운곡


http://cafe.daum.net/qwd5323?t__nil_cafemy=item






글쓰기 삭제


이전글 홈페이지 활성화 요청
다음글 영덕의 운계서원의 담장과 재사의 허물어진 모습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