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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돈옹공(遯翁公) 박구(朴 球)에 관한 조사
작성자 박중열 작성일 2013.01.03
파일 돈옹공 박구 님을 기리며.hwp 조회수 158707

박구(朴 球) 1357년~1396년

영해 삼대시중(三代侍中)이신 封(봉) 강양백(江陽伯)으로 봉작 받으신 박함(朴瑊)의 증손(曾孫)이며, 父는 박영필(朴英)로 평안북도에 있는 용만현의 현감을 지내셨으며, 母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朴赫居世 始祖로 부터 47世이고 朴堤上 始祖로부터는 39世이시다.

호(號)는 돈옹(遯翁:혹자는 둔옹으로 잘못알고 있음)이요 자(字)는 경옥(景玉)으로 고려(高麗)가 망하자, 안동 지실촌(安東 知悉村: 현 안동시 월곡면)으로 와서 관직(官職)을 버리고 피해 산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기사리(棄仕里)로 고쳤다 한다.

고려 충정왕(忠定王)元年에 太平科 입시(入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고 공민왕(恭愍王) 8년(서기 1359년)에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어 부친을 따라 복주(福州:현 경북 안동시의 옛 이름)로 옮겨와서 살았음.

또 공민왕 15년 가선대부 운봉감무(雲峰監務: 현감)가 되었다가 3년후에 고향으로 돌아옴.

* 監務란 고려중기 조선전기에 중앙의 관원을 파견하지 못한 지방의 작은 현(縣)을 다스리기 위하여 두었던 지방관으로 태종 13년(1413년)에 현감으로 고쳤다.(naver 국어사전)

공민왕 22년 권농병마단련판관(勸農兵馬鍛鍊判官: 종6품의 외직 무관(外職武官)의 벼슬에 오르고 공민왕(恭愍王)3년(서기1391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등극(登極) 여러 차례 협력을 청했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심으로 기관 은퇴(棄官隱退:벼슬에서 물러섬)함.

業績으로는 삼대시중공(三代侍中公)의 정사(精舍: 학문을 가르치는 집)인 봉송정(鳳松亭)을 慶北 寧海에서, 慶北 安東 임하현(臨河縣)기산촌(岐山村)에 保谷洞 創建후 55년만인 1390년에 이건(移建)하였으나 봉송정(鳳松亭)은 장구한 세월속에 管理不實과 노후로 폐허(廢墟)되매 후손들이 협력하여 安東市 西後面 城谷里 697번지(독실 마을)에 서기 1916년에 이건(移建)하였고 그후 100여년이 지난 2009년 寧海朴氏 後孫들의 誠金과 安東市廳의 도움을 받아서 後孫 朴殷雨의 主管으로 새로이 改築하여 安東市 地方文化財에 등제되어 현존하고 있다.

봉송정의 뜻은 계중지봉 임중지송(鷄中之鳳 林中之松)에서 따온 것이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돈옹공(遯翁公)의 忠臣之道를 칭송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봉혜덕지쇠고비불복반류여정상송명월청풍반)鳳兮德之衰高飛不復返留與亭上松明月淸風伴: 돈옹공은 과연 봉(뜻이 높고 고아한 인물 상징)이로다. 이제 그 어진 덕이 쇠하여 높이 날아가 정자옆 소나무에 비친 밝은 달과 맑은 바람과 즉 자연을 벗삼아 즐기며 돌아오지 않는 구나! )

遯翁公 구(球)께서는 조선시대 태조 5년(서기1396년)에 서거(逝去)하였으며 묘소(墓所)의 位置는 안동시 월곡면 삼산리(삼산박씨곡안장(三山朴氏谷安葬)의 도로변 산기슭(山麓)에 父 영필(英弼)의 墓所와 母 貞夫人 파평윤씨(波平尹氏)의 묘소가 있는 지척인 거리의 마을앞 동산 기슭에 돈옹공의 묘소가 배위 숙인(淑人) 예안김씨(禮安金氏) 묘소와 함께 있다.

(아래쪽이 돈옹공(遯翁公)의 묘이고 위쪽이 拜位인 禮安金氏 묘)

해마다 10월이면 안동, 예천, 영주, 봉화, 김화, 서울 등지의 많은 후손들이 모여 참배한다.

돈옹공의 묘비 및 유허비는 19대 孫 태현(泰鉉) 주선(周旋)으로 세우고 숭예사(崇禮祀)에 배향(配享)하다.

돈옹공(遯翁公)의 子로는 강의(强毅)가 있으며 자(字)는 호신(虎臣)이며 태종조(太宗朝)에 별시위 함길도 도사(別侍衛咸吉道都事)를 루비발령(累比發令) 하였으나 불취(不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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