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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운계서원(雲溪書院)에 관한 내용
작성자 박중열 작성일 2013.01.01
파일 운계서원(雲溪書院)에 관한 내용.hwp 조회수 1137

운계서원(雲溪書院)

所在地: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거무역리 519번지

운계서원은 1824년(순조 24) 영해지역 유림의 공의로 신라의 충신 박제상과 고려의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박세통, 그리고 임진왜란 때 영해향교의 위패를 지켜낸 처사 박응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건립 당시에는 위패를 모시던 3칸의 상현사(尙賢祠)와 강당인 8칸의 운계당(雲溪堂)을 비롯해 신문(神門)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전사청(典祀廳) · 정문(正門) · 주소(廚所) 등을 갖추고 선현의 배향과 지방교육에 일익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기존의 서원은 없어지고 그 규모가 대폭 줄어들었다.

현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인 사당과 정자만이 남아 있다.

1887년 후손 박내덕 박동진 재실로 건립하여 추원재라 칭하였다.

1987년 丁卯 거무역리에 중건하며 봉송정을 같이 중건하였다.

1) 박제상(朴堤上, 363년~418년)

박제상은 신라의 충신으로, 자는 중운(仲雲)이고 호는 관설당(觀雪堂)이다. 박혁거세의 9세손이고 파사이사금의 5세손이며 영해박씨(寧海朴氏)의 시조이다.

박제상은 눌지왕(訥祗王) 때의 사람으로 삽량주(歃梁州)의 태수로 재임하고 있었다. 눌지왕이 그에게 이전 임금이던 실성왕(實聖王)때 고구려와 왜국(倭國)에 볼모로 잡혀간 아우들을 구해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박제상은 눌지왕 2년(418)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장수왕을 설득해 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를 데려왔다.

그러고 나서 박제상은 바로 그 해에 왜국으로 건너가 눌지왕의 또 다른 아우인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때 박제상은 지혜를 발휘하여, 신라의 왕이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자신마저 해치려 하여 도망왔다고 하면서 거짓으로 망명을 청했다.

왜국의 왕은 신라를 침범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박제상을 이용하기 위해 그의 망명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박제상은 왜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자주 미사흔을 만나 뱃놀이를 하며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짙은 날 마침내 미사흔을 신라로 떠나보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왜국의 왕은 그를 잡아들여 온갖 문초를 하면서 자신의 신하가 되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박제상은 “나는 신라의 신하이다. 신라의 개와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왜왕의 요구를 거부했다. 왜국의 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 보냈다가 곧 화형에 처하고 목을 베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눌지왕은 박제상을 대아찬(大阿飡)으로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했다.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박제상이 죽던 날 그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벼락이 내리쳐서 왜왕이 두려워 벌벌 떨었으며,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고,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제상의 이러한 행적에 대해 세종대왕은 “신라 천 년에 으뜸가는 충신이다.”라고 하였고, 정조는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길이 빛난다.”라고 극찬했다.

2)박문량(朴文良)

충렬공 박제상의 아들이며 신라 자비왕때 명신인 박문량은 제상의 아들로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항상 가난 속에서 청빈하게 살았으며 거문고를 즐겼고, 의복이 남루하여 백군데나 기운 누더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3)박명천(朴命天)

관설당(觀雪堂) 조상의 26세손이며 사본영해(賜本寧海:임금이내려주신본관)하신 분으로 영해박씨 중조(中祖)이시다.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서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하셨으며 예원군(禮原-현 寧海-君)에 봉(封)하시니 거무역(居無役)에 시거(始居)하셨다.

4)박세통(朴世通)

박세통은 고려 고종(高宗)과 충렬왕(忠烈王) 때의 문신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역옹패설』에 따르면, 박세통이 통해현(通海縣)의 현령으로 있을 때 밀물에 떠밀려온 거북을 구해준 덕분에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과 손자까지 시중(侍中)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에 전해져 오고 있다.

5)박홍무(朴洪茂)

통해군(通海君) 세통(世通)의 자(子)이며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겸(兼) 밀직사세자빈객령(密直使世子賓客令)을 지내시고 영해삼시중공(寧海三侍中公)의 한분이시다.

6)박함(朴瑊)

밀직사(密直使) 홍무의 자(子)로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을 지내시다. 호(號)는 력옹(櫟翁)이며 봉(封) 강양백(江陽伯)되시다.

7)박응천(朴應天)

박응천은 박세통(朴世通)의 후손으로, 자는 희실(希實)이며 영해 황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예법과 도리를 익혀 영해향교의 장의(掌議)로서 모든 행실에서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박응천은 향교가 왜적에게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그곳에 모시고 있던 다섯 성인의 위패를 모시고 서쪽으로 50리나 달아나 등운산(騰雲山) 깊숙한 계곡 바위에 숨겨놓았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위패에 제물(祭物)을 올리면서 지극 정성으로 보호하다가, 전란이 끝나자 다시 원래의 위치로 안치했다. 이를 본 마을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운계서원의 건물은 사당과 정자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된 홑처마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창호는 정면 3칸이 모두 골판문 쌍여닫이를 설치하였다. 기단은 화강암으로 3단을 쌓았으며, 주춧돌은 주좌를 새긴 둥근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사당 왼편에 2칸 규모의 사각정자가 있다.

* 社團法人 韓國書院聯合會 에서 기고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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