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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종기의 박제상 순국지(목도) 탐방기
작성자 박한진 작성일 2008.09.24
파일 조회수 3104

 

  이종기 의 박제상 순국지(木島) 탐방기

 번역을 하면서 

 이 기록은 역사탐방가 이종기(李鍾琦)씨가 1977년9월27일부터 20회에 걸쳐서 일본 통일일보(현 세계일보)에 계재한 일본어 탐방기록 입니다. 이분은 우리의 聖祖 觀雪堂의 역사적 사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일본 각지를 탐방하면서 이 기록을 남겼읍니다. 관설당을 나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힘든 일을 하신 필자에게 우리들 寧朴人으로서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필자를 직접 만나고저 수소문 했드니 이미 10여년전에 작고하고 그 따님 한분이 서울 마포에 살고 있다는 것 만 확인 했습니다.       

  2006년에 원문을 접하고  번역을 했는데 이제야 대종회 홈 페이지에 소개하게 됐습니다.                          

     

 월래 원문 그대로 번역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고 싶었으나 학자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많고 고증을 하기 위해서 서술한 부분도 많아서 관습어로 고치거나 생략했읍니다. 저의 짧은 글로 이런 만용을 하다 보니까 이해가 않 되시는 부분도 있을 것 입니다. 지적하여 주시면 잘못된 곳을 고치거나 이해하시도록 노력 하겠읍니다.


 감히 부연할 것은 이종기씨는 이 기록에서 관설당께서 순국하신곳이 日本國 熊本縣 芦北町(九州)에 있는 木島라고 굳게 믿게 된것 같읍니다. 우리들의 입장으로서는 1,600년전부터 현재까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명시하고 있는 博多津(九州)의 木島가 觀雪堂순국지라고 믿어 왔고 족보에 대대로 그렇게 기록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어덴지는 아무도 실증을 못했는데 지금 이종기씨가 확인한 木島를 가늠하니 우리 寧朴의 기록과 가장 가까운 것 같읍니다.

 지금 일본국 대마도에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모마리치순국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1600년 동안 가만히 있든 사람들이 뭣 때문에 갑자기 많은 돈을 드려서 비를 세우고 선전을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무튼 이런일이 생기니까 좀 어리둥절 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 寧朴은 누가 뭐라 해도 관설당의 순국지에 대해서는 그 분의 충절을 의심치 않는것과 같이 확고하게 자신을 가저야만 하며 1600년 동안 굳게 믿어온 박다진 목도를 절대 의심해서는 않됩니다.

  이종기씨는 다행히 우리 寧朴이 갖이고 있는 그 신념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현지탐구를 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기록은 일본 현지를 수십회 왕복하면서 이룬 것으로 과거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얻기 힘든 자료입니다. 寧朴된 사람으로서 소중하게 읽어 보시기 바라 마지 않습니다.  


         번역한 사람 :  박한진(김화문중).   HP 010-9187-1439  

          1

            - 朴堤上  그 죽음과 영광 -

피는 글자나 말보다 진하다. 가령 그것이 1,600년이라고 하는 시간 저쪽의 것이라 하드라도 朴堤上公이 흘린 피의 농도는 그 시간을 극복하기에 충분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나는 동경(東京)에서의 20일간을 이 확신을 모-든사람이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빗속을 뛰어 다니며 규슈(九州)일대의 옛날의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한 어느날 제1부 연재에 관해 상의할 일이 있어서 통일일보사에 들렸드니 담당자가 다른 일로 바빠서 2시간 정도 기다리는 사이, 시내중심가에서 전에 생각하고 있었던 地名이나 찾아 보기로 했다.

 전에 한국을 떠나기 전 가나가와(神奈川)에 산다는 한 일본인 독자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분 이야기가 “일본 고대역사서의 건국신화에  “쓰꾸시(筑紫)의 히무까(日向)의 다찌바나(橘)의 고도(小戶)의 아하기하라(檍原)라는 곳이 있다고 했다. 옛날 일본의 발상지 인듯 한데 그 소재가 분명치 않습니다”라고 했다.  즉 옛날 옛적 일본나라가 처음 생겨난 곳인 아하기하라(檍原)가 어딥니까 하고 한국사람인 나에게 질문해 왔다.  나는 이 의문에 관해서도 생각을 해 왔는데 아하기하라는 지금의 구머모토(熊本) 동쪽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옛날 일본의 수도는 박제상공의 순국지와 간계가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역자 주). 나는 2시간을 그 숙제를 푸는데 쓰기로 작정했다.

 우선 그러한 기록을 하고 있는 일본 고대역사서나 기록문서를 찾아야한다. 몇군데 책방을 뒤지다가 천만 다행으로 1940년에 일본 철도청이 간행한 “聖地古日向” 이라는  고서를 발견했다.  그 책자안에 아하기하라는 미야사끼(宮崎)시의 동북쪽 4키로에 있다고 명시했다. 이렇게 분명한 지명을 모르는 일로 외면하는 일본의 대 출판사 이와나미(岩波)문고의 오소리티가 씁쓸했다.

아무튼 아하기하라의 확인이 박제상공에게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이 사실은  나의 확신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을 갖이고 큐슈(九州)로 떠났다.

  이번으로 규슈(九州)에는 세 번째 간다. 지난 번에는 부관 페리로 직접 하찌다이(八代)로 갔으며 한달 간의 노력끝에 야마다이국(邪馬台國:옛 일본나라)견문이라는 한권의 책을 엮어 동경(東京)에서 출판하게 됐다. (그 과정도 필자에게는 한권의 책으로 낼 맘큼의 곤혹과 방해를 받으면서 그것을 극복해 나간 고난의 연속이였다). 그래서 그 추고를 동경에서 보기로 하고 일본으로 가서 그 일이 끝나는 시점에서 다시 야간 열차를 타고 규슈(九州)로 간것이 작년 봄이 였다.. 얼만가의 인세를 받아가지고 그것을 자금으로 하여 다마나(玉名)에 네릴때 그 기분은 매우 당당 했었다. 그 때에 필자는 이번의 탐사를 위한 제일 중요한 고지를 점령하고 1,600년을 소급하는 여행을 추진할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 하였었다. 물론 그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같이 증언하는 “석탈해(昔脫解)는 본래 다바나(多婆那)국의 소생이고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일천리에 있었다”라고 하는 기록을 믿고서 처음으로 얻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위지(魏志가 말하는 여왕국)을 어디로 할것인가 이다. 석탈해는 1세기 사람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왜국이라는 것을 3세기에 히비고(卑弥呼여왕: 이 호칭도 존칭하나 부치지 않으며 심한 경우 쌍소리까지 해 댄다)와 같이 땅속에서 솟아 나온 것 처럼 취금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집단이 고대국가를 칭하고 나오기 훨신 이전부터 한곳에 정착하여 나라 만들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리라 생각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왜국을 魏志의 안내를 받아 찾아가서 왕성과 왕능등 모든 것이 남아있을 하찌다이(八代)市로 정했다. 여기서 북쪽으로의 길은 모두 동북방향으로 돼 있으니까 그 육로를 더듬어서 75키로 가 되는 구마모도(熊本)縣 다마나(玉名)市를 탐사해서 거기를 다바나(多婆那)國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 우선 다마나(玉名)=다바나(多婆那)가 되여서 그렇게 되면 신라 제2기의 리-더인 석탈해가 본래 있었든 곳은 규슈(九州)가 된다. 그렇게 되면 “逆도 眞이다”라는 이치에 의해서 다마나(玉名)의 서남 75키로에 있는 하찌다이(八代)는 왜국의 왕도로서 재 확인되는 것이 되여 일석이조의 의미를 갖는다. 이미 말 한대로 이곳에서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는식으로 다마나군지(玉名郡誌)의 증언을 만났다. 그래서 약 40일간, 이 땅의 옛적 역사에 관심을 갖는 고장 젊은이들의 지원을 받으며 모두 석탈해의 출신에 연계되는 방증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 간의 나의 움직임에 주목해 온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의 다마나(玉名)통신원에게 내 탐사를 당신이 써 보내 봤자 편집국에서 받아주지 않을걸요 ?하고 별로 관심도 보이지 않았는데 우직한 이 청년은 기어히 그 문제를 갖이고 서일본판(西日本版)이기는 하지만 톱으로 그것도 5단기사로 야마다이=八代說을 활자화 발표했다. 1976년5월29일토요판이 였다. 이 때 그 방면의 전문가의 코멘트를 일일이 물어보는 성실성을 가지고 그 통신원은 일을 해 나간 듯 했다. 그래서 다마나(玉名)=다바나국(多婆那國)說 에 대해서

 “다바나국(多婆那國)은 불교경전에도 나와 있고 인도에도 있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문학적으로 하는것이라면 모르지만 다바나(多婆那)가 다마나(玉名)이라고 하는 것은 성급한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화적인 것이 많다”

 이러한 정중한 핀찬을 받았다. 필자는 이 기사를 읽고 부지부식간에 양 주먹을 쥔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필자의 성급함으로 인해서 조상의 기록까지 들먹이면서 그 기록이 만든이야기(신화)라는 모욕을 받은 꼴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평온한 마음으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코멘트 했다.

 “고대 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있는 동북대하교 이노우에히데오에게 묻는다. 대정15년(1925년) 당신나라의 근엄한 교육자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고안조(孝安朝) 시대라는 년대를 부쳐서 다마나(玉名)郡人 석탈해라는 자가 신라중흥의 왕이 되였다고 郡誌에 기록하는 씨를 갖어 왔소”.     


  연재를 시작한지 벌써 3회가 되였다. 그러나 朴堤上公 순국의 땅을 찾아 가자면 아직도 먼 곳에서 서행하고 있다. 혹자는 뭣인가 생각이 달라서 그러느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필자 입장에서 보면 1974년부터 시작된 이 탐사의 결과를 여기에 처음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한 다름으로 왔소 갔소 하는식으로는 않 된다. 자신을 소개한다면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이고 나이는 50에 가깝다. 그리고 전에 출판된 책도 그렇지만 이번의 이 글도 일본땅에서 일본어로 글을 써서 일본땅에서 출판을 해야 하는데 범 일본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다. 여하간에 필자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않된다. 필자의 일언은 필자의 생애와 조상(朴堤上公)의 명예에 영향한다는 심각한 생각으로 이 기록을 만들고 있는것이다.  

 

 필자가 이곳 규슈(九州)에 올때 까지는 木島(목도)를 水島로 잘못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필자가 예전에 倭여왕국의 왕성(九州의 후꾸오까縣에 있음)을 비정할 때 그 왕성에서 水島까지의 거리가 약 8키로 있었다는 것이 머리에 밖혀 있었고 木島라는 것이 눈에 띠지를 않아서 그 水島의 水자가 木자로 잘목 인각됐으리라고 생각하고서 水島를 지도상에서 찾는 일부터 하기로 했었다.  

 구주(九州)의 水島에 관한 일본의 기록은 고대로부터 여러곳에서 찾을수 있었다. 나는 여러 고증을 통해서 水島가 아시기다(芦北)의 근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일본에 왔다. 그런데 문제는 水島를 아시기다(芦北)라는 넓은 지방에서는 찾을수가 없고 아시기다(芦北)에 있다는 노사까노우라(野坂浦)를 찾아야 되도록 돼 있다. 그래서 준비해온 30만분의 1지도를 펴 놓고 찾았으나 눈에 띠지를 않는다. 동경시내를 허매고 다녀서 5만분지1지도와 2만5천분지1지도를 구했다. 우선 급한 마음으로 5만분지1 지도를 펼쳤다. 거기에 노사까우라(野坂浦)가 한자도 틀리지 않고 아시기다(芦北)町의 해변 중심부에 기재되여 있는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살펴 보니까 거기에는 놀랍게도 한자 틀리지 않는 木島라는 이름의 섬이 바다위에 찬연히 떠 있었다. 감격의 순간이 였다. 다시 정확함을 기하기 위해서 20만분의 1지도를 더 구하여 세 지도를 면밀히 검사하기 시작했는데 어디에도 木島라는 이름의 섬을 다른곳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결국 朴堤上公 순국의 땅으로 기록된 木島라는 곳은 일응 아시기다(芦北)의 노사까노우라(野坂浦)에 떠 있는 3개의 섬의 중앙에 있는 제일 큰 섬(주위4백미터)으로서 현재도 그대로 불리는 木島로 잠정했다. 그것은 이 섬을 중심으로 해서 규슈(九州)) 서해안 일대에는 어디에도 동일한 이름의 木島가 없기 때문만도 아니다.

 대개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 역사 만들기에 관여한 사람들은 후대의 역사가를 위하여 인위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다. 쉽게 애기해서 어쩌다가 그렇게 된것이고 보통의 생각과 행동의 범주안에서 그렇게 되는것이다. 木島를 아시기다(芦北)의 노사까노우라(野坂浦)에 있는 섬으로 잠정한것도 필자의 평범한 생각으로서의 그것으로서 우선 내가 그 시대의 왜왕(倭王)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옥에 가두워 놓은 뱃심좋고 강직한 이 사람을 외부와 단절시키지 않으면 않된다. 인질이 도망간 사실도 숨겨야 하고 모마리(朴堤上公의 일본측 이름)에게 속은것도 관계자 외에는 알리고 싶지 않다. 따라서 왕의 거처 옆에 있는 섬은 너무 가깝고 그렇다고 먼 바다 한가운데로 보낼려니까 저당한 곳이 없다. 그리고 한번 속기는 했으나 모마리의 그 용기와 지혜와 논변은 왜왕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은 매력이 있었다. 그러 하니 그 용맹 강건한 사람을 회유하여 충성스러운 신하로 만들수만 잇다면 이번의 사건도 의외로 나뿌지 만은 않을 것이다. 일단 가두워 놓기 위해 구출선단의 발진기지 근처에서 적당한 섬을 물색해 보자. 노사까노우라(野坂浦)의 木島가 가장 적합하다. 그곳은 왜왕 거처의 남쪽으로서 신라와 정반대의 곳이기도 하고 배로 한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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